복음의 열정을 품은 선교사들의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
민족정신과 독립정신, 애국정신을 가르쳤던 선교사들
피와 땀으로 세워진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자

최선 박사
최선 박사

금년은 영국(웨일즈) 출신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를 당한지 1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선교는 존 로스 선교사의 선교사역 기준으로 보면 151년이 되었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준으로는 141년을 맞이한다.

장구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복음의 열정을 안고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소중한 사명으로 복음을 전하여 준 선교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헌신과 사랑으로 한국교회에 남긴 세 분의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1897년 대한제국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제국주의자들은 자국의 선교사들에게 독립운동과 같은 현실 참여에 아예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의 고통을 안고 있는 백성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가르쳤던 귀한 분들이다. 바로 보딩 선교사, 우리암 선교사, 우리암 선교사의 아들 우광복이다.

그 중에 첫 번째, 보딩 선교사(Maren Petersen Bording, 1878-1957)는 덴마크 출신의 미국인 간호선교사였다. 그녀는 1922년 내한하여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우리나라 의료면허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점으로 질곡에 시달리며 무지와 가난과 굶주림에 신음하던 때였다. 특히, 영아 사망률이 40%를 웃돌던 때에 그는 굶주리는 공주와 대전의 아기들에게 우유를 보급해 사망률을 5% 이하로 낮추며 어린들의 생명을 살렸다. 우유 보급을 통해 아기들의 사망률이 낮추어지자 건강한 아이로 성장 시키려는 소망으로 우량아 선발대회를 개최하였다. 부모들로 하여금 아기를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데 보딩 선교사는 큰 공헌을 하였다.

두 번째, 미국 콜로라도 출신의 한국명 우리암(Frank E. C Williams 1883-1962)이라고 불리는 프랭클린 E. C 월리엄스 선교사이다. 샤프 선교사의 순직 이후 1906년 공주에 파송되어 감리사로 사역하였고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의 물결을 공주제일교회를 통하여 경험하였다.

일제가 허황된 제국건설을 위해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이를 좌시 할 수 없었던 미국 정부의 반일 정서가 높아지게 되자 일제는 조선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괴롭히며 탄압하였다. 이에 1940년 미국과 일본의 대립으로 인한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 영사관은 한반도의 모든 미국인에 대한 철수령을 내리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 인도 가지아바드에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5년간 머물렀다. 이 때 인도에 있던 영국군 사령부에서 광복군들을 상대로 영어교육을 했다.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에 배속된 광복군이 일제 통신을 감청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암 선교사가 뒷받침을 했다.

우리암 선교사는 샤프선교사의 죽음으로 유명무실해진 남학교를 되살려 충남 지역 최초의 근대 학교인 영명중, 고등학교를 34년간 교장으로서 운영하였다. 미국에서 농학 석사학위를 받은 농업전문가였던 우리암 선교사는 겨울 농한기에는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대사경회를 열어 말씀 사역과 함께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우리암 선교사는 해방 후 미군정 농업부 고문으로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건립되도록 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2023년 우리나라 정부는 대한민국의 근본을 다진 선교사들께 감사하며 우리암 선교사 사후 61년 만에 건국포장을 수훈하였다.

세 번째, 우리암 선교사의 첫 째 아들 조지 월리엄 한국 이름은 우광복(1907-1994)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하루 빨리 광복하기를 바라는 우리암 선교사 부부의 염원이 담긴 이름이었다.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공주에서 자랐으며 미국 콜로라도로 돌아가서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 미 해군의 군의관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다. 당시 군정 책임자인 하지 사령관(John Reed Hodge 1893-1963)의 특별보좌관으로 발탁이 되었다.

미군의 고위층 요청으로 인사 및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선교사들로부터 신교육을 받았던 기독교 인물들과 아버지 우리암 선교사가 세운 공주 영명학교 출신들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 50명 중 35-48명이 기독교인으로 구성이 되도록 하여 미군정 시절 소수파였던 기독교가 남한에서 실권을 얻는 데 주요한 기여를 하였고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1994년 미국에서 소천하였다. 공주시 영명중, 고교 동산에 11살 때 세상을 떠난 여동생 올리브의 곁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일부 유골은 영명동산에 잠들어 있다.

지금까지 세 분의 선교사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들은 보딩 선교사와 월리엄스 선교사 부자의 헌신과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애국자들을 양육하였다.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이 사회와 국가의 중요한 처소에서 각자 재능을 발휘하면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 역량을 끼치고 있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피와 땀으로 세워진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선(崔宣) 박사(Ph.D., Th.D.)
SBCM KOREA 대표
前) ALU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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