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스콧 애니올 박사의 기고글인 ‘그리스도인이 애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It’s good for Christians to mourn)를 1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애니올 박사는 G3 미니스트리의 부대표이자 편집주간으로 섬기고 있다. 또한, 아칸소주 콘웨이에 위치한 그레이스 바이블 신학교(Grace Bible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다소 의아한 대목을 만나게 된다. 창조, 타락, 홍수, 족장들의 웅대한 이야기를 지나 마무리에 이르면, 성경은 갑자기 속도를 늦추고 마지막 장의 절반 이상을 한 사람, 야곱의 죽음과 애도, 장례에 집중한다.
요셉은 아버지를 위해 울며, 의사들이 40일 동안 정교한 향체 과정을 거친다. 온 애굽이 70일 동안 애곡하는데, 이는 바로에 대한 애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영예였다. 병거와 기병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행렬이 가나안까지 동행하여 장례를 치르는데, 그 광경이 너무 두드러져 현지 가나안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애벨 미스라임(애굽의 애도)’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장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경 전체에서 이처럼 영예롭고 세세하게 묘사된 장례는 없다.”
왜일까? 왜 창세기는 생명의 폭발로 시작했으면서 마지막에는 한 인물의 죽음을 길고 상세하게 기록하며 끝맺을까? 여러 면에서 창세기의 중심 질문은 “어떻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가?”였다. 유다가 아버지에게 드린 간청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섭리에 이르기까지, 그 목적은 늘 “생명을 보존하는 것”(창세기 45:5)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결국 한 관 앞에서 멈추게 만든다.
그 이유는 창세기 50장이 성도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애도가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성경은 죽음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도전하는 길을 제시한다.
죽음을 원수로 받아들이기
오늘날 문화는 죽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종종 해당된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부정하려 한다. “죽었다” 대신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으로 완화시키고, 장례를 “삶을 기념하는 자리”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장례는 생일, 결혼식, 졸업식과 같은 인생의 축제가 아니다. 장례는 삶이 끝났음을,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 현실인지 인정하는 자리이다.
성경은 달리 가르친다. 먼저, 죽음을 죄의 비극적이고도 부자연스러운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타락 이전에는 죽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7)고 명하셨다. 아담의 죄는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고(고린도전서 15:21), 그 참혹한 현실은 창세기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죄를 가리기 위해 잡힌 첫 희생 제물, 가인의 아벨 살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창세기 3:19)라는 말씀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죽음을 원수로 인식하고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요셉은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 울었고,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요한복음 11:35). 솔로몬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전도서 7:2)라고 했다. 애통은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장례는 산 자를 위한 자리이며, 죽음의 무게를 직면하고 슬픔을 나누며 고별하는 과정이다. 믿는 자는 죽음을 침입자로 부르고, 반드시 애도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부활로 죽음을 거스르기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애통은 세상의 것과 다르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거스른다.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물은 부활이라는 확실한 소망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의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3-14).
바울은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의 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장례 자리에서도 이렇게 외칠 수 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장례가 세상에 강력한 증거가 되는 이유다. 애굽과 가나안 사람들이 야곱의 장례를 보고 깊은 슬픔과 함께 미래의 약속을 붙드는 희망을 목격한 것처럼,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애도를 통해 진정한 소망을 본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롭게 되는 소망
창세기 50장은 바로 이 소망으로 가득하다. 야곱의 장례 행렬이 굳이 가나안까지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선언이었다. 장례는 성도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자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또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에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올 것이다”(창세기 46:4)라고 말씀하셨다. 막벨라 굴에 묻히는 일은 하나님 말씀을 붙잡는 행위였으며, 장차 주어질 기업에 대한 보증이었다.
모세는 이 장례 행렬을 출애굽을 예고하는 언어로 묘사한다. 바로가 요셉에게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창세기 50:6)고 한 말은 훗날 모세에게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나가라”(출애굽기 12:31)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야곱의 마지막 여정은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족장들에게 가나안은 더 큰 소망의 상징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애도한다. 눈물을 흘린다. 상실의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슬픔은 영광스러운 소망으로 가려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기업이 하늘에 우리를 위해 간직되어 있음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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