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부스티요스 목사
미겔 부스티요스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미겔 부스티요스 목사의 기고글인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악한 영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한가’(Why Christians still need deliverance from demonic oppression)를 최근 게재했다.

부스티요스 목사는 The Children’s Bread Deliverance Ministry의 설립자이자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목회자이자 엑소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몇 년간, 현대 교회는 예수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 중 하나인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deliverance)’에 대해 점점 더 침묵하고 있다. 구원은 우리의 신앙의 초석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영적, 감정적,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속박 가운데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 가운데 귀신을 쫓아내셨다면, 왜 오늘날 교회는 같은 일을 하는 데에 그렇게 주저하는가?

해방 사역은 주변부 교리가 아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말씀하셨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과 긍휼이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표징이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 불안, 대물림된 저주, 영적 억압에 시달리며 침묵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신자는 귀신의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오히려 더욱 외로움 속에 남겨진다.

해방 사역자이자 목회자로서, 필자는 교회 안에서도 악한 영적 억압이 공공연히 숨겨져 있는 현실을 직접 목격해 왔다.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읽고, 사역에 헌신하는 이들이 악몽, 중독, 성적 유혹, 자살 충동 등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도움이다. 자유다. 그들에게 필요한 예수님은 단순한 ‘구세주’가 아니라 ‘해방자’다.

영적 전쟁의 개념에서 가장 오해되는 부분 중 하나는 ‘소유(possession)’와 ‘억압(oppression)’의 구분이다. 성령은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죄, 외상, 세습된 불의 등을 통해 법적 권리가 주어진 경우, 악한 영은 마음, 의지, 감정의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이것이다. 회개, 끊음의 선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통해 그 법적 권리는 철회될 수 있다.

우리는 영적 전쟁 한복판에 있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가 혈과 육이 아닌, 정사와 권세를 상대로 싸운다고 말한다. 이 전쟁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곧 원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교회는 어둠의 일을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 즉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세대는 영적·정서적 외상으로 깊이 상처받은 세대다. 우리의 문화는 마술, 성적 타락, 반항, 그리고 오컬트(occult, 주술적 요소)를 미화한다. 이런 영향들이 신자의 삶 속으로 침투할 때, 악한 영적 견고한 진이 형성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상담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심리치료가 아니라 ‘해방’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영혼을 묶고 있는 사슬을 끊을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해방 사역이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가 아니라,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속임수다. 그는 신자에게 “너는 더럽다, 무가치하다,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거짓을 심어준다. 그러나 해방을 통해 하나님은 단지 고통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다시 진리를 회복시키신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회복된 정체성, 되찾은 기쁨, 새롭게 부여된 사명을 목격한다.

초대교회는 이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표적과 기사가 따랐음을 본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으며, 도시 전체가 변혁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기대가 왜 다르지 않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브리서 13:8). 우리는 무능한 복음을 전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권세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해방 사역은 선정적인 쇼가 아니다. 그것은 거룩함이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포로 된 자를 자유케 하러 오셨다”(누가복음 4:18)고 하신 그 사명을 실현하는 일이다. 해방은 치유와 명확함, 그리고 오랜 침묵 가운데 고통받던 이들에게 회복을 가져다주는 사역이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긍휼의 사역이다.

우리가 진정한 부흥을 원한다면, 사람들을 얽매는 속박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해방 사역을 선택이 아닌, 복음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이제 교회는 다시 권능과 목적 안에서 일어서야 한다. 싸움을 외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권세와 사랑으로 대면하자. 자유는 단지 가능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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