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먹지말라, 피를 멀리하라”(창 9:4, 레 7:26, 행 15:20)

서헌제 박사(교회법학회장, 중앙대 명예교수, 대학교회 목사)
서헌제 박사(교회법학회장, 중앙대 명예교수, 대학교회 목사)

하나님은 대홍수 이후 노아에게 모든 산 동물을 사람의 식물로 허락하시면서, 고기를 그 생명인 피째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창 9:4). 모세의 율법도 새나 짐승의 피를 먹는 것을 금한다(레 7:26).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담긴 명령일 것이다.

신약시대에 들어서 구약 율법의 준수가 구원에 필수적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자,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우상의 제물,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는 최소한의 윤리 규범을 제시했다(행 15:20). 이 명령은 도덕률이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공동체 통합을 위한 문화적·목회적 배려였다. 이후 교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칼빈 등도 이 구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했으며, 현대의 수혈과 연결 짓지 않았다.

그런데 의학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수혈을 거부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그들은 성경의 “피를 먹지말라, 피를 멀리하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응급상황에서도 수혈을 거부한다. 이로 인해 의료진은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생명보호 의무 사이에서 큰 딜레마에 빠진다.

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인공 고관절 수술을 받으며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되더라도 수혈을 받지 않으며 그 결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의료진에게 묻지 않겠다”는 취지의 각서를 작성하여 제출했지만, 수술 중 출혈 과다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검찰은 수술 의사를 업무상과실치사죄로 기소했다.

제1심과 제2심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하며 환자의 선택에 따라 수혈을 하지 않은 것은 형법 제24조에 규정된 피해자 승낙에 의한 행위로 범죄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역시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 논리는 달랐다. 대법원은 “수혈을 대체할 방법을 선택한 환자의 결정도, 실제 생명의 위협이 닥쳤을 때까지 유지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 중 어느 하나에도 우위를 둘 수 없을 경우, 의사는 자신의 직업적 양심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뿐 아니라 어린 자녀의 수술에도 수혈을 거부한다. 다량의 출혈이 동반되는 심장교정수술을 앞둔 자녀에 대해 수혈 동의를 거부한 사건에서, 법원은 “수혈은 아이의 생명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며, 수혈거부는 정당한 친권 행사의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이어 “부모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혈을 거부할 자유는 있지만, 생명권은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되는 헌법적 가치로, 다른 권리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판시하며,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혈을 허가했다.

판단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의 치료에 있어서는 친권자가 승낙을 대행할 수 있지만 이처럼 수혈을 하지 않으면 사망이 분명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종교상 신념에 따라 수혈을 거부하는 것은 친권의 명백한 남용이다. 종교의 자유가 자녀를 무모한 순교자로 만드는 데까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 인간의 혈액 자체를 금기시하지 않는다. 더욱이 수혈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치료행위의 하나이다. 왜곡된 교리를 근거로 꼭 필요한 상황에서도 수혈을 거부함으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성경이 엄히 금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부작위로 어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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