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는 본격적인 장이 현세인가 아니면 내세인가에 따라 인생에 대한 이해는 많이 달라지게 된다. 만약 이 땅이 아닌 영원한 세계가 인간이 살아갈 본격적인 삶의 장이라고 한다면 이 땅위에서의 삶은 그것을 준비하는 삶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인간이해에서는 인간의 현세와 내세 중 내세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어왔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의 말씀들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는데, 예를 들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 19-20)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현세에 살면서도 내세를 늘 준비하는 삶을 살 것을 명하셨다.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 2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의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전제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지만, 정작 육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빌라도에 대항할 군대를 일으키시지는 않았고, 오히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셨다. 예수께서 빌라도를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셨다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독립은 이루어졌을지 몰라도 온 인류의 구원의 문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심을 두시기는 하였지만, 그 보다는 모든 인류가 영원히 구원 얻을 수 있는 신국을 여시는데 그의 몸을 드렸다.
내세를 강조한 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고 하면서 현세에서 고난을 당한다 할찌라도 내세의 행복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암시하였고,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전 15:54) 라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는 내세에 영원한 몸을 입고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였다.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이러한 말씀들에 근거하여 내세적 차원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는 인간이해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에큐메니칼 인간 이해는 내세와 현세 중 현세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에큐메니칼 신학이 의미하는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질 영생의 차원보다는 이 땅 위의 해방과 번영에 더 많은 강조점이 주어진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에큐메니칼의 관심은 사회적 정의, 자유, 인간의 발전 등 이 땅의 문제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1968년 세계 교회 협의회 웁살라 대회 보고서 서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분명하고 널리 알려진 이 대회의 특징은 이 대회가 아래와 같은 문제들에 치중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혁명과 같은 요란한 문제들,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책임 문제, 전쟁과 평화와 경제, 정의 문제, 인간의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물질적인 필요들, 혜택을 받지 못하고, 집 없고, 굶주리는 기아의 형편 문제 그리고 모든 민간적 종교적 시설물들에 대해 반대하는 가장 급진적인 현대의 반항 문제들을 다루느라 전념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래에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에큐메니칼 신학은 내세적 차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거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이형기는 산안토니오를 평가하면서, “... 우주적 종말론의 시야를 구체적 맥락, 즉 해방신학적 주장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교회의 경험과 축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해방시키고 갱신시키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목적에 대한 징표요 미리 맛봄이다” 라고 말하였다.
즉 에큐메니칼 진영은 인간 구원의 미래적 차원을 현재적 차원으로 앞당기는 것에는 매우 익숙한 반면, 당연히 있어야 할 미래적 차원을 미래의 것으로 강조하는 데는 매우 인색한 경향을 보인다. 인간을 이해할 때도 인간의 내세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가 없는 반면, 이 땅위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결국 전통적인 인간 이해가 내세와 현세 중 내세에 방점을 찍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에큐메니칼 인간 이해는 나름대로는 통전적인 인간이해를 갖는다고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에큐메니칼 역시 내세와 현세 중 현세에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좀 더 자세한 내용과 각주 등은 아래의 책에 나와 있다.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선교와 신학』 및 『복음과 선교』 편집위원, 지구촌선교연구원 원장, 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등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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