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의 기고글인 ‘왜 하나님을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가’(Why I disagree that God is the God of 'second chances')를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블라시오 작가는 문화 옹호자, 기독교 작가, 그리고 '문화를 분별하다'(Discerning Culture)의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께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첫 인간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즉시 그들에게 다가가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라고 물으셨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관계하신 분임을 강조하며, 그분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했다(마가복음 12:26; 사도행전 7:32). 특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야고보서 2:23).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셨으며,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던 것처럼(사무엘상 3:10), 지금도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이사야 1:18).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로마서 3:23).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분의 용서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계속 나타날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사람이 도덕적 잘못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 현실이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기준이나 특정 도덕 이론, 혹은 종교적 교리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양심을 통해 옳고 그름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은 “율법의 행위가 마음에 새겨져 있음을 나타내고 양심이 증언한다”(로마서 2:15).

흥미로운 점은 문화적 담론이 사람들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하는 데는 적극적이면서도, 객관적 도덕 법칙에 대한 호소는 쉽게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이 인간이 특정 비도덕적 행동에 유전적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 무엇이 객관적으로 잘못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 법칙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객관적 도덕적 타락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회복의 아름다움을 이루신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문제는 회개하면 삶을 덜 누리게 될 것이라는 왜곡된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과 참된 성취를 제공한다.

하버드대학교 정신과 의사 아르망 니콜리 박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를 제공하시고, 다시 시작할 기회와 자원을 함께 주신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 내면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아름다움을 이루는 ‘내적 자원’을 제공하신다고 설명했다.

죄는 마음에 무거운 짐을 남기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그 짐이 제거될 때 내면의 평안이 찾아온다. 이 평안은 일시적인 심리적 위안이나 치료적 해결책이 아니다. 또한 인간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새로운 영적 본성을 지닌 원리로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보다 훨씬 고귀하고 탁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을 통해 역사하며, 회개하는 사람은 죄의 무거운 짐에서 용서의 평안으로 옮겨지는 변화를 경험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처음 교회에 갔던 주일을 잊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올 때 마음 깊은 평안과 가벼움을 느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휴양지에서 쉬는 느낌과 같았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속 주인공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외쳤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기서 내 짐이 떨어지는가? 나를 묶고 있던 끈이 여기서 끊어지는가? 복된 십자가여!”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일은 시대와 문화, 철학적·심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한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도 아름답다. 죄책감은 큰 짐이 되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재판관이 되는 셈이다.”

필자는 젊은 시절 성경 공부 모임에서 위대한 사도 바울이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사울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르치고 영감된 서신들을 기록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을 용서했을 것이라 깨달았다. 그 사실은 필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결국 필자도 자신을 완전히 용서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자신과 화해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도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완전히 값없이 주어진다는 데 있다. 바울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감사하노라”(고린도후서 9:15)라고 외쳤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관대하신가? 그분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로마서 5:8)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롭게 거듭나 그분이 의도하신 길을 걷기를 원하신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로마서 8:6)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을 단순히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기회를 주시는 분, 오래 참으시고 자비가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혼란스럽고 반항적인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는”(시편 103:12)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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