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음(Social Gospel)이란 전통적으로 개인에 초점을 둔 신앙 양상에서 복음전파의 적용을 사회에 두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복음은 믿는 성도 개인 영혼에 호소하는 타입이었는데, 복음이 그러한 개인구원 개념을 넘어 사회 상황이나 현상에 관심을 두고 복음운동을 하는 것을 사회복음 이라 말한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사회에 발생하는 제반문제들, 즉 경제, 교육, 인권, 노동, 차별, 도덕, 정치, 빈곤, 전쟁 같은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복음으로 접근, 개선이나 치유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전쟁과, 가난, 질병, 직업이나 노동, 등 모든 생활에서 고통받는 삶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방치, 또는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신학적 신념 때문에 사회복음이 대두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복음은 이성과 지식, 그리고 산업화가 한창 발달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에 미국 신학계에 확산되었다. 19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은 산업화가 한창 발전하고 있었다. 노동이나 경제수익 창출은 아무리 기계화 되었다 해도 인간이 하는 것인 만큼 인력이 대거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런 와중에 경제는 발전해 갔지만, 인간은 그 존엄성이나, 권리, 정의 측면에서 많은 제약을 받고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긴 노동시간, 생활환경의 열악성, 경제권 가진자들 중심의 사회구조 등은 여러가지 불평등, 차별에 의한 갈등들을 양산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사회복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자유나, 신체적 평안, 경제적 이득의 차이 감소 같은 성경의 도덕적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복음의 실행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복음 하면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미국의 월터 라우쉔부시(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를 들 수 있다. 그는 독일계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뉴욕 소재 로체스터(Rochester) 신학교에서 신학을 하고, 그 후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뉴욕에서 11년간 목회를 했는데, 목회하면서 신학이 사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영역, 그 개념을 벗어나 온 자연 모든 부분을 담당하시는 분이심으로, 앉아서 설교나 하고, 사변적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성경 해석이나 신학을 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실행성을 강조하는 목회를 하게 된 것이다. 1900년대 초중반, 미국은 산업화로 세계가 부러워 할 만큼 경제가 한창 발전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 라우쉔부시는 공장이나 일터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찾아가는 목회를 했다. 1일 12시간 근무, 또는 그 이상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고, 사고를 당하는 노동자들도 많았다. 개인구원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 믿음의 길로 가고 있었지만, 사회는 구조상 그렇지 못했다. 불공정, 불의, 차별, 불이익, 열악한 작업환경 같은 것이 다반사로 나타나고 있었다. 라우쉔부시는 그런 노동자 들이나,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말씀을 전하고, 때론 그런 사람들과 같이 노동을 하기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사역을 담당했는지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귀병(청각장애)을 앓기까지 했다. 라우쉔부시는 그렇게 현실에 참여하여 사회복음의 정당성을 열었던 신학자요 목회자로 역사에 남는 일을 했다.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기독교 전파를 위해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활동했다. 그 즈음 의료선교사로 온 선교사들도 있지만,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한국 기독교 교회를 설립한 대표적인 인물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조선인들의 생활과 영적 변화를 이루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할 수 있다. 당시 조선(한국) 사람들은 물질적 빈곤은 물론, 도덕적으로 무질서한 삶을 살았다. 직업적 차별, 신분차별이 심했고, 길거리에는 술 주점이 많았으며, 동시에 주정뱅이들도 많았고, 없는 살림에 도박이나 심지어 첩을 두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아가, 당시 사람들은 무속신앙에 의지하여 운명주의적 사고를 하며 살아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언더우드 중심의 장로교는 칼빈의 기독교윤리정신을 따라 경건성으로 영적 변화에 몰두하는 신앙에 힘썼고, 감리교는 생활환경이나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현장중심의 사회복지적 선교를 담당했다. 중고등학교나, 대학교 같은 교육기관 설립 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그 외 다른 교단들이 세워져 교회가 발전하기도 했는데, 한국 기독교 전체적으로 보면 말씀중심, 영성운동, 도덕적 정의, 사회정신 개조를 위한 교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할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한국에서 각 선교사들이 각양 특색의 복음화 운동을 한 것을 300여년 전에 영국의 존 웨슬리는 이미 종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영적 복음을 통한 경건과 성령운동도 하고, 말씀으로 사회 개혁도 했다는 말이다. 사실, 복음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법론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설교자나 사회복음운동가들은 대체로 한 쪽에 치우친 내용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인 영혼구원에 친숙한 사람들은 사회구원을 경시하며, 반대로 사회구원에 초점을 맞춘 목회자들은 성령운동으로 개인구원만 부르짖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을 무시해 왔다. 한 예로,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활발하게 전개될 때, 대부분의 소위 보수교단들은 사회복음의 뜻을 가진 민중신학을 “인본주의 신학” 또는 “인본주의 사회운동”이라 하여 신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상호 배치된 신앙, 신학을 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동시에 사회적 정의같은 운동이 나타났으면 좋았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영혼도 중요하지만 인간 실생활에서의 삶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웨슬리의 복음운동, 즉 설교나 신학에서 이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넓은 신학적 관점으로 왼쪽이 못하는 것을 오른쪽이 한 것이고, 오른쪽이 못하는 것을 왼쪽이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학을 어느 한 쪽 카테고리에 묶어만 두는 것은 온전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부패되건 말건, 오로지 자신의 영혼만 잘되는 신앙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또, 신학이 사회운동 차원에서 전개되어서도 되겠는가. 굳이 개인구원이니 사회구원이니 분류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된다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이 부분을 통합적으로 했기 때문에 놀라운 변화를 영국에 가져 온 것이다. 그래서 사회 일원으로서 성도들의 영혼가꾸기는 물론, 크리스챤의 사회적 관심과 책임, 그리고 돌봄의 목회가 동시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런 목회와 신학적 사고가 이 시점에 필요하다. 만약, 꼭 그렇게 하기 어려우면 상호 신학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그런 환경이 필요하다 할 수 있겠다.
사회복음을 위해서 한국교회는 존 웨슬리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는 사랑을.”
웨슬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교단 간의 차이처럼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논의와 행동에서 사랑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정신은 교회 연합을 촉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여겨지며, 천국과 지옥의 문제가 아니라면 연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양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