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 잠시 형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 적이 있다. 방 두 칸 중 한쪽에는 항상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뒤에는 큰 불상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어릴 때는 작은 불상을 모시다가, 자녀들이 성장한 뒤 큰 불상으로 바꾸셨다. 불상 아래에 있는 작은 문을 열면 성인 한 명이 누울 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나는 종종 그 안에서 기도하다 잠들곤 했다. 청소년의 나이였다면 무서웠겠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성전임을 알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하나님, 각 사람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부르셨기에 믿지 않는 가정에 저를 보내시고 목회자로 부르신 분명한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라는 기도를 자주 드렸다. 하나님의 부르신 뜻에 순종하는 삶은 그 어떤 것이든 감사할 조건이 충분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가 없으시기에, 나는 오늘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쁨으로 나아간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입에서 흥얼거리는 말이나 노래가 곧 진심이 될 때가 있다.
이재국 – 넘버 쓰리여도 괜찮아

우리는 두 시대를 동시에 살아간다. 죄와 육체의 지배를 받는 아담의 옛 시대와, 성령과 새로워진 마음에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의 새 시대는 중첩되어 있다. 이 갈등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앞서 바울은 이것이 이미 신자의 삶 전체를 압도하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죄와의 투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래전 아담 안에서 이미 패배한 싸움을 묘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 오랜 패배로 점철된 싸움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귀결되도록 결정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창조와 현재의 타락한 세상이 교차하는 매우 좁은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다.
그랜트 R. 오스본 외 3명 - 죄와의 투쟁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은 ‘아들 안의 생명’이며 창세전 영원의 세계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는 생명입니다(요일 5:11, 1:3).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영원을 잃어버린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영원에서 이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자마다 아버지의 집, 영원으로 인도하십니다(요 14:2-3).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이나 신비 체험 등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 은혜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자가 없느니라”(요 14:6). 기독교의 구원은 ‘그 진리’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이성, 또는 경험 등과 같이 인간에게서 또는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로 아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바로 하늘에서 오신 ‘인자’(the Son of Man),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 3:13; 8:32). 즉 기독교의 진리는 헬라 사상처럼 영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서형섭 – 기원 복음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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