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슈아 아놀드 작가의 기고글인 ‘학살과 총기 난사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탄절은 어떻게 희망을 가져올 수 있는가?’(Massacres and mass shootings are everywhere. How can Christmas bring hope?)를 최근 게재했다.
조슈아 아놀드 작가는 워싱턴 스탠드의 선임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스와 논평에 모두 기여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2월 중순의 한 주말을 뒤흔든 연쇄 총격 사건들은, 죄로 병든 세상이 얼마나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다. 세상은 인간의 행동에만 의존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이 세상을 괴롭히는 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희망이 없다. 그러나 대림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참된 소망은 곧 빛이신 분, 신적 구원의 사명을 품고 이 땅에 오신 분, 그리고 그 탄생으로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중요성을 처음 확립하신 그분 안에 있다.
지난 13일(이하 현지시각) 브라운대학교에서 기말고사 대비 리뷰 세션 도중 정체불명의 가해자가 총기를 난사해 학생 두 명이 숨지고 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어 그다음 날에는 호주 시드니 본다이 비치에서 하누카 첫날을 맞아 모인 2천 명의 유대인 군중을 향해 아랍식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총격범이 발포해 16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병원에 이송됐다.
호주에서 발생한 이번 총기 난사 사건은, 이 나라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피해자와 사건의 맥락을 고려할 때 특히 충격적이다. 10월 7일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현대 국가 이스라엘과는 무관하게,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와 폭력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이번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도 지닌다. 하누카(요한복음 10장 22절에 언급된 ‘봉헌절’)는 마카비 혁명 이후 성전이 재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당시 레위 제사 규례에 따라 새 기름을 준비하기까지 필요한 여덟 날 동안, 하루 분량의 기름이 기적적으로 타올랐던 사건을 기념한다. 성전의 등잔대는 이스라엘 백성 위에 비추는 하나님의 임재의 빛을 상징했다(민수기 8:2, 6:25). 이 절기를 기념하기 위해 호주 유대인들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히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그 빛을 끄기 위해 총격범들이 나타났다.
이 비극을 두고 세계의 지도자들이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들의 시선은 오직 세속적인 해결책으로 향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정부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며, “더 강력한 총기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반이스라엘 정책은 오히려 호주 내 반유대주의를 부추겨 왔다. 결국 지난 15일, 호주 내각은 만장일치로 총기 규제 강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총기 규제 강화가 해답은 아니다. 호주는 이미 엄격한 총기 규제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시민권자를 포함한 부자(父子) 총격범이 펌프액션 산탄총과 볼트액션 소총으로 붐비는 해변에서 40명이 넘는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유대인 보호 조치 역시 12개월 동안 무려 1,650건에 달하는 ‘반유대 사건’을 막아내지 못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역시 전국에서 가장 엄격한 총기 규제를 자랑하지만, 그곳에서도 대학 총격 사건은 발생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 지도자들이 인간 정부의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규모 총격과 반유대주의는 영적 타락에 뿌리를 둔 도덕적 문제다. 인간 정부는 기껏해야 범죄를 억제하고 고통을 완화할 수 있을 뿐,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타락은 정부 자체의 성격마저 왜곡해 왔다.
하나님은 인간 정부를 그분이 정하신 역할 안에서 선을 이루는 도구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공직자이든 시민이든 사람들이 정부를 구원자로 우상화할 때, 그 정부는 감당할 수 없는 신적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고 만다.
구원은 타락한 인간 정부 안에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는 압제와 부패로 기울어지고, 인간 사회는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어두움”(이사야 8:22)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오래전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전에 고통 받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1-2). 이 빛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정사를 그의 어깨에 메었”을 때 임할 것이다(이사야 9:6).
마침내 여기, 정부라는 막중한 책임과 완전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분이 약속된 것이다.
마카비 혁명은 유대인의 정치적 국가를 세웠지만, 하나님의 약속된 나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불과 150년 만에 지도자들은 로마와 타협했고, 그 결과 경쟁자의 소문만으로도 아기들을 학살하는 잔혹한 왕이 등장했다(마태복음 2:16). 25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유대 국가는 멸망했고, 성전은 폐허가 된 채 백성은 흩어졌다.
그러나 그 시기 동안 하나님은 역사를 구속하기 위한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다. 자기 백성에게조차 인식되지 않은 왕을 보내신 것이다.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분명히 증언한다(마태복음 4:16). 요한은 예수를 “사람들의 빛”이라 부르며, “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한다(요한복음 1:4-5).
그러므로 이 계절을 어둡게 만드는 인간의 참혹한 범죄들은 오히려 인간적 해결책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인간 정부를 신뢰하는 정치적 구상은 죄로 물든 마음이라는 진짜 문제를 고칠 수 없다. 정치적 해결을 목표로 하는 종교들조차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죄 사함과 참된 정의, 그리고 창조 세계의 회복에 대한 유일하고 확실한 소망의 근원은, 세상의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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