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6.25의 기적들'을 연재하면서 불현듯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1994년 가을 “나는 돌아온 사자(死者)입니다.”라는 소감과 함께 국민들에게 생환 신고를 한 조창호 소위이다. 그는 6.25전쟁 때 강원도 인제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생포된 후에 북한에서 '국군 포로' 신분으로 43년간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등의 고초를 겪다가 기적처럼 살아돌아 온 전설적인 인물이다. 필자는 1995년부터 조창호 소위와 교제를 나누면서 여러가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총신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던 필자는 조창호 소위와 함께 전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특강과 간증을 진행하는 일이 잦았다. 1996년 4월 22일 필자는 전제현(서울 오산고 교장), 박세록(북미기독의사회 회장), 조창호 소위와 함께 마산 문창교회에서 집회를 갖기 위해 마산을 방문하였다. 네 사람은 김해공항에서 내려 마산으로 가는 중에 진해에 있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가에 들러기로 약속하였다. 때마침 길가에는 벗꽃이 만발하였기에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진해의 주기철 목사 생가를 찾아가는 길 - 좌로부터 박세록, 조창호, 필자, 전제현(1996.4.22) ©김형석 교수 제공

필자는 아버지 뻘되는 세 분의 어른을 모시고 남해 바닷가에 살던 주기철이 왜 부산, 대구, 서울, 평양의 명문 학교를 뒤로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위치한 오산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세 분은 저마다의 사연을 나누었다.

이날 동행한 전제현 교장은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월남한 실향민으로 6.25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예비역 장군이다. 박세록 박사는 원산 출신의 실향민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리주 디트로이트에 살면서 웨인주립대학교 의대 교수로 활동하던 분이다. 실향민 출신의 두 분은 조창호 소위의 사연에 안타까워하면서 북한의 실상에 관해 물었고, 조창호 소위는 강연에서 공개하기 어려운 사생활까지도 얘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한 번은 조창호 소위와 군산 개복동교회에 집회를 데려간 적이 있었다. 조창호 소위와 얘길 나누고 싶어하는 어른들 때문에 집회가 끝난 후에도 간담회가 마련되었고 거의 11시가 되어서야 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밤이 늦은 시간에 내가 운전하여 서울로 올라오는데, 고속도로를 탄다는 것이 진입을 잘못하여 지방도로로 들어서고 말았다. 당시는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어서 낯선 시골길을 밤새 여행하며 조창호 소위의 기구한 사연을 진솔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누나와 두 동생과 함께 한 조창호(좌 2) 소위의 어린시절 ©김형석 교수 제공

조창호는 1930년 10월 2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유복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의 가정에서 7남매 중의 두 누나를 둔 장남으로 자랐다. 독립정신이 강했던 할아버지는 장손인 그에게 안창호와 같은 애국자가 되라고 이름을 '창호'(昌浩)라고 지어주었다. 3살 때 인천으로 이사하였고, 경기도 시흥을 거쳐 7살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온 가족이 새문안교회를 다녔으며,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있을 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집 지하실에 숨어지냈는데, 그해 9월 서울이 수복되자 10월에 어머니의 권유로 자원입대했다. 육군종합학교를 1기로 수료하고 1951년 4월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본부 직속 101대대 관측담당으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현리전투에서 패배하고 중공군에게 끌려가는 국군 포로들 ©김형석 교수 제공

이후 의용군에 배속되었지만, 1952년 국군포로 동료들과 탈출을 계획하던 중에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을 기도한 반동분자'라는 혐의로 악명 높은 덕천, 서천, 함흥 등지의 노동교화수용소에서 12년 6개월간을 갇혀 지냈다. 또다시 13년간을 자강도 자성군의 구리광산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규폐증 판정을 받고서 탄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중강진으로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만난 중국 보따리상의 도움으로 1994년 10월 3일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20일간 해상을 표류하다가 10월 23일 새벽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곧바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된 조창호 소위는 다음 날 기자들 앞에서 회견을 갖고 “죽어도 조국 땅에 묻히게 되어 여한이 없습니다.”고 소회를 밝혔다. 25일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라며 귀환을 신고한 후, 서울현충원을 찾아가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그동안 6.25전쟁 실종자로 처리했다가 1977년에 1계급 특진과 함께 전사자로 재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날 전사자 명단에서 삭제한 후 육군 중위로 진급 명령을 받았다.

이후 조창호 중위는 11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 통일장'을 수여받은 후, 다음 날인 11월 26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4년 3개월이라는 최장 기록의 군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전역식에서 길고도 참담했던 북한 억류생활을 이겨낸 힘은 신앙심과 전쟁터에서 배운 군인 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김영삼 대통령이 조창호 중위에게 보국훈장 통일장을 수여하고 있다.(1994.11.25)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러면 조창호 주위가 생포된 현리 전투는 어떠하였는가?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중공군·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5월 16일 중공군은 3개 사단을 동원하여 국군 제7사단 지역을 공격했다. 이에 제7사단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퇴각했고, 17일 새벽에는 제3군단의 보급로인 오마치고개도 중공군에게 빼앗겼다. 결국 제9사단과 제3사단도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하면서 현리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날 오후 5시 무렵 국군은 오마치고개 탈환작전을 개시했다. 원래 계획은 제9사단 30연대가 공격에서 736고지와 785고지를 확보하면, 제3사단 18연대가 후속 공격에 나서 오마치고개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먼저 공격하던 제9사단 병력에 대한 지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혼란에 빠져 방태산으로 퇴각하자, 현리에서 대기하던 제3사단도 다음날 새벽 방태산으로 퇴각을 시작했고, 계방산을 넘어 결국 평창의 하진부리까지 물러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장병들이 중공군에게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김형석 교수 제공

5월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을 점검하니 국군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의 병력 2만 2천 명 가운데 4천 명의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하였고, 대포 등의 중화기도 그대로 버려둔 채 퇴각했기 때문에 전력의 손실이 70%에 달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 때문에 현리전투는 한국전쟁사에서 '임진왜란의 칠천량해전' '병자호란의 쌍령전투'와 함께 3대 패전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현재 인제군 상남면에는 현리전투 위령비가 설치되어 있다.

당시 15살의 나이로 학도병에 자원하여 제 3군단 예하 3사단 18연대에 배치되었던 정병석 인제 문화원장은 "적군이 점령한 능선과 계곡을 피해 가파른 산 중턱을 탈출로 삼아 밤낮 없이 걸었으며, 곳곳에는 탈진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전우의 시신이 흩어져 있었으나 미처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6.25 참패 현리전투 참가 정병석 씨」 <연합뉴스>( 2011.12.11)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연합뉴스 캡쳐

다행히 23일부터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세는 역전되고, 퇴각하던 도중에 산속에 낙오되어 있던 병력들도 상당수 구조되었다. 25일 유엔군 총사령관은 현리전투의 패배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단을 해체했으며,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했다. 이때부터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으며,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유엔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현리전투에서 치욕적으로 패배한 요인으로는 지휘관들의 무능이 꼽힌다. 제3군단이 포위당하자 유재흥 군단장은 부군단장을 대리자로 지정하고 항공기편으로 군단 본부로 돌아갔다. 그는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백선엽 장군은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p.136) 이로 인해 사단장들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6.25의 기적들④ -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
국군 3군단이 현리전투에 패배하자 백선엽 1군단장과 미 장군들에게 작전 지시하는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김형석 교수 제공

물론 일각에서는 제3군단만의 책임이 아니라 상급부대인 미 제10군단의 비 협조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불가항력이었다는 반박도 제기한다. 그러나 현리전투의 패배로 인해 발생한 행방불명자 가운데 상당수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북한으로 이관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6.25전쟁 당시 발생한 국군 포로 중 320여 명이 북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전향했고, 북한은 이런 사실을 들어 국군 포로의 존재를 부인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조창호 소위의 귀환은 국군 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문제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말년에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540여명의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조창호 소위는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 장기 노역으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암과 뇌졸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중에도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이제 국군 포로와 강제 납북자의 문제는 우리의 과제로 남겨졌다. 제 나라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가치가 없는 무능한 정부이다. 6.25전쟁 발발 71년을 맞아 전쟁으로 희생당한 모든 국민과 국군 장병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국군 포로와 강제 납북자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기도한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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