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하던 1914년 12월 24일 프랑스 서부전선 이프르(Leper)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하루동안 전쟁을 멈추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눈이 내렸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상상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한 독일군 병사가 방벽 위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웠다. 잠시 후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Silent Night)’ 캐롤이 들려오자 영국군 병사들도 화답했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성이 터지면서 양측 병사들이 참호를 나와 서로 악수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다. 후일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을 접하게 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2005년 영국·독일·프랑스 3국의 합작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2014년제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서는 ‘성탄휴전 100주년 문화행사’ ‘성탄휴전 축구시합 100주년 기념비 제막’ 같은 행사를 개최하여 크리스마스 휴전의 역사적 의의를 계승하였다.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진 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사건이 줄을 잇는다.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X-Mas의 기적을 보도한 영국의 <데일리 메일> ©김형석 교수 제공

이렇게 세계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크리스마스의 기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의 출생에 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은 이러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기세를 몰아 북진했는데,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데 이어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이때 북진을 지휘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부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었다. 국군 제1군단은 원산을 거쳐 두만강 유역으로 진격하고, 미 제7사단은 부전호를 거쳐 압록강 유역으로 진격하고, 미 제1해병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개마고원의 장진호 방면으로 진격하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전쟁에 대거 개입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또다시 소용돌이쳤다.

이 가운데 미 제1해병사단은 함흥에서 장진군을 거쳐 강계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진격했는데, 11월 19일 장진호 서북쪽의 서한면 유담리까지 진출했다. 장진호 지역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써 10월이면 눈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 30°아래로 떨어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인데, 그 해는 유독 추워서 영하 45°까지 떨어졌다는 참전용사들의 증언이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뿐만 아니라 생전 처음 경험하는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장진호전투 당시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좌)과 혹한 속에 싸우는 미 해병 병사(우) ©김형석 교수 제공

연합군은 장진호 일대의 서부와 동부전선을 장악해가며 군단을 배치하였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군 하갈우리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북측 내륙에 깊이 침투한 연합군을 쫓아 온 중공군은 약 12만 명에 이르는 병력으로 장진호 일대에 집중시켜 포위하였고, 11월 27일 중공군의 야간 선공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장진호에 배치된 연합군은 미 해병대 1사단, 미 육군 7사단 소속 1개 연대, 영국 코만도 1개 대대 등 총 병력이 3만 명이었다. 결국 혹한의 추위 속에 대규모 병력에 포위되어 격전을 치르던 연합군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장진호 전투의 의미를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보면 현대전에서 미국과 중국의 군대가 맞붙어 싸운 최초의 전투이다. 미군과 국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미 제1해병사단은 1만5천 명 중에서 전사 604명, 병사 114명, 실종 192명, 부상자 3485명으로 전사상자가 4천 명이 넘었다.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의 손실은 이보다 더 컸으며, 국군의 경우 육군 2개 사단과 해병대 제1연대의 합산 피해는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전사상자의 절반 정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자연환경과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고려할 때, 전쟁사에서 가장 완벽한 철수작전의 하나로 꼽힌다.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함흥에 묻힌 미 제1해병사단 전사자들 ©김형석 교수 제공

장진호 전투에 실패한 미 제10군단은 예하 부대에 흥남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약 10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국군은 흥남에 집결한 후에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에 걸쳐서 193척의 선박을 타고 38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때 철수하는 미군과 국군을 따라 월남한 피난민도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배에 태우고 가는 것을 꺼렸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 데다가, 병력과 장비·물자를 싣는 데도 수송선이 충분하지 않았고, 만약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면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을 비롯한 국군 지휘관들이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며 극렬하게 반발했다.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배를 타기 위해 흥남 부두로 몰려 온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게다가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던 현봉학도 피난민들을 배에 태우고 갈 것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결과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울 수 있도록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태우고 갈 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22일 밤. 살을 에는 한겨울 바닷바람에 흥남 부두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은 모두가 초조한 모습이었다. 항구에는 7600t 화물선 매러디스 빅토리호가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정박하고 있었다. 정원 60명에 승조원 47명이 탑승했고 남은 자리는 13명뿐이었다.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수송선인 이 배의 선장은 35세 레너드 라루였다.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매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을 기다리는 피란민들 ©김형석 교수 제공

라루 선장은 부두에 떼를 지은 피난민의 처참한 광경을 내려다보다가 승조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피난민을 태울 수 있는 데까지 태워 보자! 가급적 많이."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피난민이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군수품을 싣기로 했던 화물칸은 피난민으로 가득했고 갑판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하나씩 바다에 버리며 더 많은 사람이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왔다. 탑승은 16시간이나 이어졌다. 긴 탑승 끝에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무려 정원의 230배나 되는 1만 4000여 명을 태웠다. 그 가운데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섞여 있었다.

마침내 배는 흥남항을 출발했다. 바다에 잠긴 기뢰 수천 개가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빅토리호는 멈추지 않고 항해를 시작했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공포 속에서 목숨을 건 항해가 3일간 이어졌다. 배 안에서는 운항 중에 놀랍게도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절망 속에서 새 생명이 피어난 것이다.

미군은 이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김치 1'부터 '김치 5'까지 차례대로 불렀다.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 항해 중에 배 안에서 태어난 김치 5를 포함한 승선자 1만 4005명은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라루 선장은 <항해 일지>에 "3일 동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고 적었다. 그의 말처럼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대의 구출작전으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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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 5' 이경필(좌)과 '김치1' 손양영(우) ©김형석 교수 제공

라루 선장은 1954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고, 뉴져지의 한 수도원에서 마리너스 수사로 수도에 정진하다가 2001년 8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의 말이다. "어떻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제겐 그 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한 메시지가 다가옵니다."(「이달의 전쟁 영웅'으로 되살아난 '크리스마스 기적' 」중앙일보, 2020.12.23)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매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 ©김형석 교수 제공

1955년 한국 정부는 레너드 라루(1914~2001) 선장에게 흥남철수작전의 공로를 기려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65년이 지난 2020년 12월 국가보훈처는 고인이 된 그를 '이달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영웅은 현봉학 박사이다. 영화 <국제시장>은 현봉학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첫 화면에 등장하는 이들의 대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알몬드 장군)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적은 흥남 남쪽 원산으로 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

현봉학은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민 9만8000명을 미군 LST에 실어 남하시키기 위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을 설득했던 주인공이다. 1922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출생한 그는 1941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4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한 후 1947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5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와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중에 6.25전쟁을 맞았다. 그 해 11월 알몬드 장군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미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되었다.

2016년 12월 19일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앞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는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만약) 현봉학 박사와 흥남철수작전이 없었더라면 나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부모가 매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한 것을 상기시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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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을 마치고(둘째 줄 좌에서 5번째가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 ©김형석 교수 제공

한편 '김치 5'인 이경필은 거제 해성고등학교를 나와 경상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ROTC 11기생으로 강원도 철원에서 복무했다. 이후 그는 장승포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면서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나는 지난 2013년 이경필 원장과 중아일보가 주관한 1090평화와통일운동을 함께 하며 교제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라루 선장,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알몬드 장군을 설득한 포니(Edward. Forney) 대령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면서 "이분들을 널리 알리고 감사함을 표시하고 기리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흥남철수작전의 공로로 현봉학 박사는 2000년 4월과 2013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호국 인물'로 지정되었고 2014년 12월에는 '이달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현봉학을 도와 피란민들의 승선을 허락받도록 기여한 포니 대령은 2018년 12월, 알몬드 장군은 2020년 9월, 라루 선장은 그 해 12월에 각기 '이 달의 전쟁 영웅'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알몬드 장군에 맞서서 피란민을 배에 탑승시킬 것을 주장하던 김백일 장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흥남철수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김백일 장군의 동상 곁에는 그보다 더 큰 '김백일친일행위단적비'를 세워져있다.

6.25의 기적들③ -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형제
김백일 장군의 동상과 그 곁에 선 김백일친일행적단죄비 ©김형석 교수 제공

육군 참모총장이던 정일권 장군 수기에는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나눈 대화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 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모두들 아우성이야.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네.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거든 잘 수습이나 해주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역사의 뒤안길에는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연들이 존재한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당시 함경남도 함주군 덕천교회를 담임하던 이계실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는 취지에 찬동하는 5개 교회(덕천교회·동상리교회·기곡교회·장흥교회·상수리교회)의 교인들과 더불어 순장(순 장로) 교단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1950년 12월 장진호전투에서 패배한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흥남철수작전이 전개되자, 피난길에 오르게 된 이계실 목사는 통역장교이던 현봉학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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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교단의 모 교회인 동천교회와 교역자 양성기관인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전경 ©김형석 교수 제공

이에 현봉학은 부친(현원국 목사)의 친구로 평소 친분이 있던 이계실 목사 가족만 안전하게 모시겠다고 제안했으나, 이 목사는 자기 가족 뿐아니라 순장 교단 교인들을 함께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이 목사의 거듭된 요청에 현봉학과 포니 대령(사령관의 특별 작전보좌관)은 알몬드 사령관에게 민간인을 더 많이 데려가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해서 유엔군 수송선을 타고 경남 거제도 연초면으로 이주한 5개 교회의 교인 130여명은 '연합 덕천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회담이 체결되고 8월 15일에는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1955년 3월 전 교인들이 집단으로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구 신길동에 덕천교회(1967년 동천교회로 개명)를 설립했다. 그리고 교회 개척에 나서 서울에 신천교회(1962), 대천교회·창대교회(1967)를 설립한 것을 필두로 지방과 미국 캐나다 일본 등에도 교회를 세웠다. 지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장측'으로 4개 노회, 50여개 교회에 6천여명이 적을 두고 있다. 아마도 흥남철수작전 당시 가장 큰 기적을 체험한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흥남철수작전의 얽힌 사연들을 통해 6.25전쟁의 교훈을 되새겨 본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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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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