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김형석 교수(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코로나로 인해 온 국민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답답한 일상을 겪는 와중에도 신록의 계절 6월은 또다시 찾아왔다. 6월은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과 유토피아적인 민족 통일의 소망을 담은 6.15공동선언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키워드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시간이다.

그런데 정작 역사학계에서는 두 사건에 관해 제대로 정리된 연구서가 없다. 6.15공동선언의 경우 불과 20여년 전의 사건으로 역사가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부적절하다고 할지라도, 70년이 지난 6.25전쟁에 관해서조차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초기에 정치학자들과 군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6.25전쟁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소위 '운동권 출신'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들은 6.25에 대한 역사학적인 고찰보다는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전쟁의 기원을 따지는데 노력을 경주하였다. 결과 6.25전쟁의 발발 요인을 두고 외인론과 내인론이 충돌하였으며, 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도 남침설을 부정하고 북침설과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다. 전쟁의 피해 또한 북한군에 의한 남한 국민들의 희생보다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 마디로 북한의 남침에 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실체는 외면하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미국과 소련의 패권 충돌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6.25의 기적들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쟁터로 향하는 국군과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피란민들의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이같은 유형의 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연구서로 꼽히는 것이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돌베개, 1988)이다. 박세길은 이 책에서 6.25전쟁에 관한 종래의 인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박세길은 북한군에 의한 6.25전쟁의 남침설을 부정한다. "북한이 소련에서 군 장비를 구입하는 것은 전쟁이 발발한 6월에도 수송 중에 있었고, 북한에 남한에 대한 최대의 공격을 가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7월 말경에 이르러서였다. ...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 당시 북한은 동원 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위의 책, pp.240-1)

둘째, 6.25전쟁의 기원을 외인론보다 내인론에서 찾고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한국전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개시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전쟁은 이미 제주4.3항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이상의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치러진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대규모 충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쟁이라고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른바 교전확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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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시가전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셋째, 6.25전쟁은 북한군의 남침이 아니라 남북한 군대의 상호 충돌로 발생한 것으로 설명한다. "1950년 6월 25일 본격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남북한 군대 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끈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p.242) "이 같은 충돌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지역 사령관. 특히 남한 군 지휘관의 주도로 발생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거의 통제하지 않았다. ... (이에 반해)북한은 38선 근처의 자기 군대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통제를 가하고 있었다."(pp.244-5) 저자는 상호충돌론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남침유도설이나 마찬가지 논리이다.

이렇게 박세길의 주장에서 북한의 남침설은 찾아 볼 수도 없다. 전쟁의 책임은 남한 군에 있거나 남한 내부에 있다. 그는 이어서 전쟁 상황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25일 새벽 4시경 38선을 경계로 맞대고 있는 옹진, 개성, 동부해안지구에서 북한군과 남한군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p.247) "한편 전쟁 개시 당일 북한의 내무성은 다음과 같이 공식 보도를 행했다. 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남조선 괴뢰정부는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38도선 이북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였다." 이런 그의 설명은 북침론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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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의 필수 도서인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김형석 교수 제공

이 같은 박세길의 주장은 교육현장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전교조 출판국에서 펴낸 <이 겨레 살리는 통일>에는 6.25전쟁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외세의 의도와 민족 대단결의 실패가 결합되어 형성된 남북 분단정부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무력 증강에 들어갔다. 남쪽에서는 제주4.3사건 등 사실상 내란 상태에 들어갔고 38선에서의 군사 충돌도 잦았다. 한국전쟁 전까지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충돌은 모두 874회였다. 이러한 군사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위의 책, p.31) 한 마디로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상호 군사충돌이라는 주장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6.25전쟁의 결과에 대한 평가이다. "전쟁 결과 우리에게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고 온통 폐허만 남았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엄청난 수혜를 받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의 자본이다. ...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위기 극복의 '굴러온 호박'이었다. ... 이로써 미국은 공황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한반도는 죽음과 파괴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pp.32-33) 이 주장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전쟁 책임론으로 귀결된다.

6.25의 기적들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분명한 역사의 왜곡이다. 1994년 6월 2일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은 크렘린궁에서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후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전달 받았다. 과거 소련이 보관했던 남침 계획 등을 담은 극비문서인 고문서 사본이었다. 230여종의 문서에는 1949년 1월부터 53년 8월까지의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 간에 오간 전문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록 등 한국전쟁의 진상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극비 자료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6.25에 관해서도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남침계획을 승인받고, 이들과 남침 시기 등에 대해 긴밀히 협의한 내용들이 자세하게 담겨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후일 회고록에서 "이 문서들을 통해 남한의 종북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해 온 북침설과 수정주의가 완전히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기록하였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pp.298~299) 이를 두고 "이 자료가 공개되면서 북침설은 소설이 되었다."(서울신문, 2010.6.9)는 평가가 이어졌다. 박세길이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또 다시 써야 하는 이유이다.

6.25의 기적들 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영삼 대통령이 옐친과의 한러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문서>를 전달받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러면 역사학계에서는 6.25전쟁에 관한 연구서가 전무한가? 그것은 아니다. 국내 역사학자가 쓴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전쟁 연구서인 박태균의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책과 함께, 2005)과 정병준의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 2006)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기존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검증만 나열되었을 뿐이고 6.25전쟁의 성격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박태균의 <한국전쟁>에는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분단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전쟁은 왜 1950년 6월에 시작되었을까?"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내적 기원론과 외적 기원론' '미국 책임론과 소련 책임론' 등을 분석하지만, 비판과 문제 제기만 있을 뿐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6.25전쟁의 기원에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공존하고 있으며, 전쟁의 책임에서 미·소 양국이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논리의 반증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료의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가는 사료(증거)가 없으면 주관적인 추측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로부터 전달 받은 <한국전쟁에 관한 문서>는 그동안 6.25 전쟁에 관해 북침설, 남침유도설, 교전확대설, 민족해방론 등의 왜곡된 주장을 바로 잡는 기본 사료가 될 것이다.

6.25의 기적들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형석 교수 제공

이에 필자는 <김형석의 역사산책>을 게재한 지 1년을 지나면서 기존의 전쟁과 통일이라는 상반된 키워드를 하나로 연결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극의 잔재를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6.25의 기적들'이라는 제목의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것은 그동안 이념적으로 바라보던 6.25전쟁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과 휴머니즘'에 기초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71년이 되었다.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보편적 용어로 사용되지만, 아직도 일반인에게는 6.25라는 말이 더 친숙하다. 그러나 그 친숙함이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고아' '미망인' '피란민' '이산가족' 등의 아픔과 분단을 상징하는 비극이다.

 

6.25의 기적들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형석 교수 제공

국가기록원 통계에 의하면, 3년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에 군인(국군, 인민군, 유엔군, 중공군 포함)과 민간인을 합쳐600만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30만명의 미망인과 10만명의 고아가 발생하였고, 이산가족의 수는 1천만명에 달하였다. 이런 수치는 반만년 한국사를 통털어서 최대의 전란이었고, 세계사적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인명 피해 못지않게 산업 피해도 엄청나서 국가 기록원에 따르면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되었고,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의 60%가 파괴되었다.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고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및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활의 터전과 사회·경제 체제의 기반이 황폐화되었다. 그 결과 1953년 정전 직후에 행해진 세계은행의 조사에 의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65달러로 전 세계 조사 대상국 110개국 가운데 109위에 해당하는 지구상에서 최극빈국이었다. 6.25의 폐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6.25전쟁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기적의 전쟁'이다. 6.25가 일어나던 당시 국군 병력은 103,827명으로 인민군 201,050명에 비해 절반에 불과했고, 전쟁을 치룰 무기는 인민군과 비교도 안될만큼 절대적인 열세였다. 지상전의 경우 야포는 인민군이 728문인데 비해 국군은 91문으로 1/8에 불과하였고, 전차는 인민군이 242대였지만 국군은 단 1대도 없었다. 이밖에 항공기는 22대로 인민군의 226대에 비해 1/10이었고, 북한군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함정은 36척에 불과했다.

이처럼 남·북한의 군사력 차이는 엄청났다. 그런 점에서 남한이 북침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 어불성설이다. 1994년 6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측으로부터 인도 받은 '6·25전쟁 관련 자료철'에는 전쟁이 발발하게 된 과정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6.25의 기적들 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형석 교수 제공

1949년 3월 7일 스탈린과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회담한 회의록의 내용이다. "스탈린 동지. 상황적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우리 군대는 남한 군대보다 강하고,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남한의 인민 대중들은 친미 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합니다."

이때 스탈린은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존재와 38선에 관한 미·소 협정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대신 3월 17일자로 '조·소 군사비밀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소련은 북한에 6개의 보병사단과 3개의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 수비 대대에 필요한 무기,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할 것과 1949년 5월 20일까지 12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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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박헌영 부수상 등 6명의 각료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 ©김형석 교수 제공

소련으로부터 대규모의 군사 원조를 약속 받은 북한은 그 다음 날인 18일에는 '조·중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군 2만5천명을 인도받았다. 이렇게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대규모의 군사력을 확보하게 된 김일성은 인민군 10개 사단 병력 13만명을 38선에 배치하였고, 후방에는 10만 명의 예비군을 조직하였다.

한편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은 1948년 9월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말에는 군사고문단 495명을 제외하고 완전히 철수했다. 게다가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4월 10일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북한군 군사고문인 바실리에프 중장에게 남침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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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스탈린 ©김형석 교수 제공

이에 바실리에프는 최단 시일에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3단계 작전을 수립하였다.

"제1단계 작전은 38선을 돌파해서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에 수원·원주·삼척을 잇는 선까지 5일 안에 진격하고, 제2단계 작전은 그때로부터 14일 안에 군산·전주·대구·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격한다. 제3단계 작전은 그 후 10여일 안에 목포·여수·사천·마산·부산을 잇는 남해 일대를 점령해서 전쟁을 종결한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북한의 승리가 예견되었고, 김일성은 바실리에프의 계획대로 한반도를 단기간에 지배하려는 구상이었다. 이같은 사정을 알고나면 한국이 6.25전쟁에서 전력상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산화되지 않고 자유 대한으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6.25전쟁의 핵심적인 키워드가 '기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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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남침 작전 계획도 ©김형석 교수 제공

기적은 6.25가 발발한 직후 미국의 신속한 대응에서부터 나타났다. 6월 25일 북한의 도발 소식을 접한 무초 대사는 북한군의 남침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였는데, 이때가 한국 시간으로 25일 오전 10시(워싱턴 시간은 오후 9시)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대통령은 즉시 회의를 소집하고 미군의 참전을 명령하였다. 당시는 애치슨 라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훗날 트루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는데 협의가 필요없을 정도로 모든 참석자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사람은 없었다." 이 같은 트루먼의 신속한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빌리 그래함은 "만약 공산당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면서, 미국이 자유와 평화의 파수군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호소하여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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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한국을 방문한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설교하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유엔의 신속한 대응 또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6월 25일 12시 30분 미 국무부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고, 그날 저녁에 유엔 대표부를 통해 안보리 소집 요구서와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26일 오전 4시에 열린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무력 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 선언하고, 결의안을 통해 '침략 행위 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요구를 이행하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자,안보리는 유엔 전 회원국에게 이 결의를 집행함에 있어 모든 원조를 유엔에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리의 요청을 받은 트루먼은 즉각 미군 공군과 해군으로 하여금 한국 정부군에 원조와 지원을 제공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미 육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지시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1주일도 안 되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고, 전쟁 기간 중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6.25의 기적들① - 6.25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형석 교수 제공

미국을 제외한 다른 유엔 국가들의 참여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유엔에 가입한 국가의 수는 93개국이었는데, 그 중에서 67개국이 한국을 도와주었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 16개국은 군대를 파병하였고, 인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5개국은 의무 지원을, 과테말라, 자메이카, 헝가리 등 40개국은 물자 지원을, 리히텐슈타인, 스페인, 이라크 등 6개국은 전후 복구지원국이 되었다. 이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물론 이것은 안보리의 5개 상임 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 이사국 가운데,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던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Yakov Alexandrovich Malik)가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만약 소련의 말리크가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의 참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소련 대표의 안보리 불참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의문 가운데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다. 다른 한편으로는 6.25의 기적을 설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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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1950.6.26) ©김형석 교수 제공

이처럼 6.25전쟁은 발발 초기부터 정전될 때까지 3년여의 시간이 매일같이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 이면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선에서 싸우면서 젊음을 희생한 수 많은 무명 용사들의 희생이 자리하였다. 필자는 6.25전쟁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그 기초 위에서 6.25의 현상들을 휴머니즘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새로운 전쟁사를 서술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미래인 청년 세대들이 6.25전쟁에 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역사적 진실을 찾아보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계속)

김형석 교수(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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