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

성경을 보면 두 흐름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과 땅,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 아브라함과 롯,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흐름은 신약에 와서도 성령과 사탄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우리 자신 안에서는 영과 육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경쟁과 갈등의 관계에 있었던 에서와 야곱이 마침내 화해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다. 전도할 때도 우리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라고 말한다. 만일 예수를 믿으면 불행해진다고 말한다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조차 떠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신다. 또한 우리의 참된 행복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오늘 본문은 에서와 야곱이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참된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전에 어느 잡지에서 행복한 삶을 위한 네 가지 조건을 다룬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은 행복의 조건으로 건강, 건전한 신앙, 만족할 만한 직업, 사랑하는 관계를 제시했다. 이 네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사랑하는 관계’다. 사람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 안에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 하는 사회적 삶이 행복을 결정한다.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 때 행복할 수 있지만, 원수의 관계, 미움의 관계, 분노의 관계 속에 있을 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전도서 기자는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고 말씀한다. 행복은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제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20여 년 만에 만나려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설레고 가슴 벅찬 만남이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두 형제는 기쁘지 않았다. 형 에서는 동생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4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고, 동생 야곱은 어떻게 하면 형의 보복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헤어진 이후 20여 년 동안 이러한 관계 속에 살아왔다. 과연 이런 마음에 진정한 행복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야곱에게 있어서 형 에서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이제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는 장면을 보자. 야곱은 에서에게 이렇게 말한다.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 이에 에서는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창 33:12)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후 야곱은 세속적 욕망을 뛰어넘어 이스라엘로 변화되었고, 브니엘 이후 형과 다툴 이유가 사라지게 되었다.

에서의 태도를 보자. 그는 야곱의 과거를 들추지 않았다. 성경은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4)고 말한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에서가 동생 야곱을 용서했음을 알 수 있다.

에서는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는 “야, 이 녀석아. 네가 과거에 왜 그런 짓을 해서 둘밖에 없는 형제가 이렇게 남남처럼 살아야 했느냐”고 원망하지 않았다. 과거의 잘못을 다시 들추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야곱을 받아주었다.

사람들은 서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다투는 경우가 많다. 서로 다투다 보면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그만일 것 같아도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래서 화해하기 위해 상대를 찾아간다.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닙니다. 나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서로 용서를 구하면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사람이 과거를 들추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말이지, 네가 그때 그렇게 했으니 내가 화가 안 났겠느냐?”

화해하러 갔다면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 주면 된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하며 과거를 다시 들추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형에게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하는 야곱에게 에서는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런데 말이지…”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말이지”라는 말은 용서가 아니라 시비를 거는 태도일 수 있다.

우리는 야곱처럼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에서처럼 바다 같은 넓은 마음으로 감싸주고 용서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 사회에 용서가 없다면 세상은 삭막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도 용서에 근거하고 있다. 용서는 인생의 진주와도 같다. 용서가 없는 사람은 덕과 멀어진 사람이 된다.

오늘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에서의 화해가 필요하다. 과거를 완전히 덮어버린 채 야곱을 끌어안고 눈물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에서의 마음이 필요하다.

동과 서의 화해, 남과 북의 화해, 여야의 화해도 마찬가지다. 화해를 미루고 계속 과거만 들추다 보면 화해와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참다운 용서는 과거를 들추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후에도 때마다 과거의 죄를 다시 들추신다면, 우리가 어찌 온전한 구속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화해와 용서의 문제를 놓고 씨름하던 야곱에게 브니엘의 은총이 임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얍복강은 어디인가? 이것은 단순히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시대사적이며 카이로스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야곱에게 얍복강은 생과 사를 가르는 자리였고, 화해와 분쟁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오늘 우리도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에 서 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평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면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드는 반평화적 현실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얍복강가에서 씨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오늘 한국교회에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벌였던 씨름이 필요하다. 원수처럼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고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분단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증오와 분열의 장벽을 높이 쌓는 데 일조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갈등과 분열, 권모술수의 대명사였던 ‘야곱’의 이름을 떨쳐버리고, 화해와 평화를 위해 씨름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통일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남과 북의 화해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분쟁과 갈등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교회가 화해의 중재자로 서야 한다.

역사의 어두운 밤이 새도록,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을 감수하며 씨름했던 야곱과 같은 기도가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 안에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용서와 화해의 복음이 이 땅 가운데 새롭게 선포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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