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비전은 하나님의 생명과 복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첫 열매가 필요하다. 이삭의 비전은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온전히 성취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커녕 겨우 자기 자신에게만 생명의 충만과 하나님의 복의 충만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제 이삭에게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온 세상에 가득히 퍼뜨려 세상을 정복할 꿈을 지닌 사람이 요청되는 때에 이른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보내진 사람이 바로 야곱이다. 야곱의 비전은 아브라함에 의하여 제시된 비전의 설계도대로 집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할 일은 꿈이나 꾸고 신앙 고백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실제로 뛰고, 달리고, 싸우고, 이겨야 하는 사람이다.
야곱은 이 일을 위해 열두 아들을 낳기 위해 결혼을 해야만 했다. 이 일은 마음만 먹고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결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명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을 위해 14년간이나 머슴살이를 했다. 또한 야곱은 자신의 양 떼를 늘리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퍼뜨려 정복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이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를 거둠으로 하나님의 영적 복을 쟁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로 보면 야곱의 생애는 투쟁적이고 공격적인 생애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비전을 이삭을 통하여 이루고, 아브라함의 비전을 마지막으로 세상 속에서 완성시킴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복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을 부를 때 아브라함 백성이라 하지 않고, 이삭 백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비전이니 당연한 일이다.
야곱이 비전을 이루기까지
인간은 본래적으로 혼자 있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도 “보라. 너희가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앞에 혼자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앞에 누구도 나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야곱은 홀로 남았다고 한다.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 콕스는 많은 군중 속에서도 홀로 있는 자의 고독을 느낀다고 했다. 야곱은 동생으로서 형 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자이다.
그러기에 모름지기 그의 축복관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것으로,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요새 말로 표현하면 부귀와 영화를 축복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야곱은 이것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래서 20년 동안에 큰 부자가 되고, 열두 가족의 아버지가 된다. 이렇게 비전의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그는 불안의 늪에서 헤매게 된다.
형제간의 불화 때문이다. 화해가 없고 부자만 되면 행복이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고 있던 야곱의 생각은 여기서 무너지고 만다. 다른 말로는 “이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차라리 가난해도 화목한 것이 나은 것이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야곱은 이전에는 형과 원수가 되더라도 부자만 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게 아닌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이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중히 얻은 아내마저 야곱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다.
우리는 가끔 홀로 있고 싶은 때가 있다. 남편이 홀로 있고 싶은데 아내가 눈치, 코치도 없이 끼어들어 참견하는 부인도 주책이다. 사람은 홀로 있고 싶은 때가 있다. 인간 실존은 재산이 많고 자식이 많아도 나 혼자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이제 야곱에게는 다 소용이 없다. 그 많은 재산, 여러 명의 아내와 자식들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한 가운데 쫓기는 신세가 된다. 부귀도 영화도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형의 낯을 피해 머나먼 하란에 갔으나 다시 돌아와야만 했고, 20년 전에 헤어진 형과 화목한 관계가 아니고 불편한 원수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화해를 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홀로 된 자의 소원이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 9-20절을 보면 많은 예물을 형에게 보내면서 하는 말이 나온다. “너희는 가서 주의 종 야곱이 우리 곁에 있다 하라.”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라고 하셨다.
우리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가?
아직도 돈이면 다이고, 아니면 명예와 부귀와 영화인가? 야곱에게 마지막은 이것들보다 화해였다. 화해가 좋은 줄은 모두가 잘 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야곱이라 합니다.” “네 이름을 바꾸라” 하신다. “네 이름 야곱을 바꾸어 이스라엘이라 하라.” 본질적으로 달라지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치니 절름발이가 된다. 절름발이가 되어도 좋사오니 화해만은 이루게 하소서. 한 번 내리쳐서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또 한 번 내리치면 죽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붙들고 “주여, 화해의 축복을 주옵소서. 형님과 불화하고는 내가 살 수 없나이다”라고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이스라엘이라 하신다.
본문 33장 10절에 형을 만나 목을 끌어안고 맞출 때, 그는 감격하여 한 말이 있다. 20년 동안 맺혔던 그 원한과 마음이 무너지고 화해가 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홀로 남은 자의 마지막 소원이다. 화목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한국교회는 짧은 기간 동안 세계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감당하며 세계에 내놓을 만할 만큼 성장했지만, 그와는 반비례로 교파 간의 갈등으로 분열의 아픔을 안고 있으며, 영호남과 여야의 갈등도 심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교회의 신뢰가 바닥을 헤매는 마당에, 이제 남북의 갈등을 넘어서 주도 한 분이고 하나님도, 성령도 한 분임을 고백하고 교회가 화해의 역군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하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교회의 화해, 나아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야곱의 씨름의 기도가 이어질 것을 다짐해 본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