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 목사
안지영 목사

"...이렇게 갈등의 관계를 풀지 못하는 바람에 헤어지는 것과는 달리,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상을 살다가 벌어지는 불륜의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부부의 속사정을 어찌 다 파악할 수 있겠느냐마는 단순히 문제를 진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부 중 한쪽이 배우자에게 성적 불만족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

젊은 아내에게서 발견되는 현상 중 하나가 산후우울증이다. 아이를 배면서 자신의 신체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에 생기는 스트레스 증상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이 쏟아부어야 할 시간과 에너지가 만만치 않기에, 자신의 현실이 암울하기만 하다. 아이를 갖기 전이거나 결혼 전에 자기가 누리던 한 젊은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다 사라져가는 것 같아 초조함이 밀려온다. 한편 젊은 남편은 남편대로 결혼 후 변해버린 환경에 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결혼 전에 자유로운 싱글의 삶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자신의 중요한 삶의 일부분을 상실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아내의 경우, 임신하면서 그동안의 일상이 다 변해버리는 것에 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더욱더 피곤한 하루의 일정이 주어진다. 두 사람 다 '이러려고 결혼했나?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사오십 대 중년의 삶은 젊은 부부의 시대와는 삶의 환경이 달라졌다.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고, 아이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 하지만 아내는 여태까지 누구누구의 아내, 엄마로 살아왔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오지 못했다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이제 젊은 시절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눈가에 주름이 지고, 몸도 아줌마 체형을 닮아간다. 이제 여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일은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산 것 같다. 단단했던 근육도 물렁거리고, 젊었을 적 식스팩은 다시 생각도 못 해 볼 꿈이다. 자녀들과의 서먹한 관계가 힘들게만 느껴진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결혼 이후 싱글이었을 때의 자유로움을 상실했을 때, 밀려오는 상실감은 자신을 더 이상 가치 있는 존재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중, 장년의 부부는 그동안 가정을 꾸려오느라 정신없이 살다가 보니 어느새 나이 든 자신의 모습에 회의감이 든다. 자기 자신은 보이질 않고, 다 식구들을 위해 산 삶이었다.

이렇게 현재 자신의 모습을 무엇인가 잃어버린 존재로 느꼈을 때, 그것을 만회하려는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다시 과거 자신의 푸릇푸릇했던 시절의 느낌을 되살리려 하다 보니, 지금까지 지냈던 배우자가 자기를 옥죄는 올무같이 느껴진다. 자기를 무조건 좋다고 하고, 치켜세워주는 새로운 인물이 더 매혹적이다. 기존의 배우자에게는 그런 신선함을 느낄 수가 없다. 젊은 부부나, 중, 장년 부부나 모두가 비슷한 현상이다. 서로에 대한 신선함과 매력을 느끼기에는 집안에서 지지고 볶아야 할 일이 지속해서 밀려온다. 하지만 결혼 울타리 밖의 사람은 자기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최고라고 해 주고, 서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편안함이 장난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유튜브 채널의 사연을 들으면서 정리해 본 '달콤한 불륜의 원인'이다. 그런데 이것이 유튜브 채널의 사연 읽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내 주변에서 가끔 이런 푸념을 듣게 된다. 내 큰 아이 부부도 이제 삼십 후반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 청년 부부 대부분이 아들 내외와 비슷한 연령이다. 다들 자신들의 현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잘못하면 가족 관계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모두가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된다.

유튜브 채널의 사연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그리워하는 아름다움을 청년 시절 싱글 때의 자유롭고 활력 찼던 모습에서 찾는다. 결혼 초반의 부부나 결혼 10년, 20년을 보내 부부의 아름다움의 기준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 과연 옳은 것일까? 모두가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니까 따라가야 하는가?

청년 시절 싱글의 풋풋한 모습은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나이에 맞게 발산한다. 다시 말해서, 아기였을 때의 아름다움과 십 대였을 때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다. 이십 대의 아름다움과 삼십 대, 특히 결혼한 후의 변화된 삶 속의 아름다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십 대의 아름다움과 오십 대의 아름다움, 더 나아가 노년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 다르다. 각각의 연령 대마다 주어진 책임과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인생의 시절에 따른 아름다움의 기준을 보지 못하고, 매번 20대 싱글 시절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기에 문제가 생긴다. 이 원리를 놓친 채 자신의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찾으려 길을 떠난다. 실제로는 자신의 현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인데 말이다. 이 원리를 놓쳐버릴 때,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젊었을 적 싱글이었을 때의 삶에서 찾기에, '그때는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내 삶이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않았는데...' 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하지만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실은, '현재 이 자리의 내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인으로서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불어난 자신의 모습을 싫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건강을 위한 조처를 취하는 것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어느새 주름이 늘어나고 어깨가 처진 모습을 비관하지 말자. 물론 건강을 위한 조처를 취하는 것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정해놓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이제 좀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나의 가치를 젊었을 적 아름다움의 기준에다 두지 말고 삶의 경륜을 쌓아가며 가꾼 시절에 따른 아름다움의 기준을 붙들어보면 어떨까?

그 무엇보다 싱글일 때는 주어지지 않았던 한 가정의 책임이 남편에게 아내에게 주어졌을 때, 그 책임을 잘 감당하는 아름다움이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나이 들었을 때도, 노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지영(미드웨스턴 실천신학 교수, 달라스 나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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