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그리스도인도 무신론자도 결국 ‘바람’에 따라 믿고 있는 것이라면?"(What if both Christians and atheists are wishful thinkers?)을 6월 1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수년 전, 아내와 필자가 알고 지내던 한 여성은 가족(형제)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겪었다. 그녀는 절망에 빠질 정도로 깊은 슬픔에 압도되었고, 우리 부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단지 이 기독교가 말하는 '최후의 결말(사후 세계와 구원)' 때문에 믿음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게 사실이기를 그저 간절히 바라고 희망할 뿐이에요."

일반적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과 사건을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게 만드는 주된 동력'으로 지목하며, 이를 심리적 나약함으로 치부하곤 한다. 예를 들어, 전 미네소타 주지사 제시 벤투라(Jesse Ventura)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조직화된 종교는 사기이며, 그저 무리의 힘에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목발일 뿐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그의 저서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에서 종교가 제공하는 희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종교는 환상이자,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절박한 소원의 성취다. … 환상 그 자체가 검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무시한다."

즉, 그는 종교적 믿음을 삶의 가혹한 현실을 견디게 도와주는 대처 기제로 보았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역시 프로이트의 의견에 동의하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종류의 소망도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무신론자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휘두르는 '소원 성취(wish-fulfillment)'라는 칼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들 역시 신의 존재에 관해 자신들만의 은밀한 '희망사항'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프로이트는 성경의 하나님 같은 신, 다시 말해, 훗날 심판의 날에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할 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무신론적 동반자였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이 기독교가 진실이기를 바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텍스트의 명백한 언어는 믿지 않는 자들이 영원히 벌을 받을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내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들 거의 모두가 포함될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교리가 아닐 수 없다."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무신론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내가 아는 가장 지적이고 식견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종교를 믿는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다. 나는 단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믿음이 옳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신이 존재하기를 원치 않으며, 우주가 그런 곳이 아니기를 바란다."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는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은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니라 '반(反)신론자(antitheist)'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나는 무신론자라기보다 반신론자에 가깝다. … 나는 일부 감상적인 유물론자들처럼 그것(종교)이 진실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 나는 이 모든 이야기가 불길한 동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만약 신앙인들이 주장하는 바가 진짜 사실이라면 인생은 끔찍할 것이다. … 나는 그보다 더 소름 끼치고 기괴한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어둠을 두려워한다고 조롱했던 호킹에 대해, 기독교 변증가이자 수학자인 존 레녹스(John Lennox)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무신론이야말로 빛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다."

이 모든 엇갈린 진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신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에서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짙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종교와 불신앙의 '진위' 계산해 보기

이는 곧 우리 모두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 두 가지 고려 사항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누군가가 자신의 입장이 사실이기를 '바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틀렸다는 의미는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기독교인과 무신론자 모두 서로 다른 세계관을 논할 때 이 점을 기억해야 하며, 누군가가 무언가를 진리라고 믿는 '개인적인 동기' 그 너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믿음에 대한 합리적 정당화와 그 믿음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동기 사이에는 명백한 구분이 있습니다. 사람의 믿음은 그의 심리적 동기 때문에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을 때, 즉 합리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을 때만 거짓이 됩니다. 따라서 어떤 견해를 비판할 때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믿는지'에 대한 심리적 동기를 공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당신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견해에 대해 어떤 '정당성'을 제시하는가입니다."

C. S. 루이스(C. S. Lewis) 역시 우리가 이 과정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제공한다:

"내가 장부를 정리한 후 은행에 내 잔고가 아주 많다고 생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이 믿음이 단지 '희망사항'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때 당신이 내 심리 상태를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어떤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실을 알아낼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직접 자리에 앉아 그 금액을 계산해 보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내 계산을 검토하고 난 후, 오직 그때서야 내가 그 잔고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 산술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 심리 상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 누군가가 왜 틀렸는지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틀렸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자신의 믿음 체계가 진짜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직접 꼼꼼히 "계산"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내 입장의 강점과 사실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반대 진영의 주장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필자의 경우, 신학교 시절 변증학과 철학 교수였던 노먼 가이슬러(Norman Geisler) 박사 덕분에 강제로나마 이 과정을 거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는 경건 서적을 읽는 시간에 무신론자들의 글을 공부하는 매우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정직하게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가이슬러 교수의 현대 철학 수업을 들었을 때, 우리는 신의 존재와 관련하여 당대 최고의 무신론자들의 글이 빽빽하게 담긴 엄청난 두께의 바인더를 받았다. 기독교 작가의 글은 단 한 편도 없었다. 내 과제는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그들의 주장이 가진 강점을 집요하게 평가하는 것이었다.

이 수업의 선수 과목은 기초 기독교 변증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기독교를 지지하는 논증에 대해 탄탄한 기초를 다진 상태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왜' 믿는지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고, 양쪽 진영의 논리를 모두 치열하게 섭렵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철학 과정을 마칠 무렵, 그 두꺼운 무신론자 바인더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게 정말 그들이 가진 논리의 최선인가?"

변증학과 논리학에서 받은 이전의 훈련들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주장은 내 믿음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내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삶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것이나 인생의 거대한 질문들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의 모든 주장은 (때로는 수천 년 전에 이미) 철저히 반박되어 온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믿음 체계의 "계산"을 치열하게 끝낸 후, 필자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극도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에 반대하는 최고의 무신론적 주장들을 마주하며 필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렸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태복음 7:25).

자, 그렇다면 아내와 필자가 알고 지내던, 가족을 잃고 비통해하던 그 여성의 경우는 어떠할까? 기독교가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녀의 소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 '그녀의 소망이 객관적인 현실과 진리에 닻을 내리고 있는가'이다.

기쁜 소식은 그것이 흔들림 없는 진리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얄팍한 '희망사항'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거센 시련의 폭풍이 닥쳐올 때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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