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교회 석기현 목사

사람 사이에서 실제로는 혈육이 아니면서도 '호형호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두 사람 사이가 남달리 각별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형제라는 것은 부모 다음으로 가까운 '2촌 사이'인데, 아무 족보 관계도 없는 사람을 가리켜 형, 아우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두 사람이 서로 가깝고 친한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처럼 서로 친근하게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래도 피차의 성격이나 취미나 배경 등이 비슷하거나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월등하게 수준의 차이가 난다면, 원래 아무 혈연도 아닌 사이가 그렇게 형제처럼 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친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이 너무 못나거나 하면, 남들 앞에서 자기 형이나 아우라고 소개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까지도 간혹 있는데, 그 사이가 원래부터 친형제도 아니었다면 더욱 말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당신의 '형제'라고 불러 주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 하반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했으며, 나중에 17절 상반절에서도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11절의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고 17절에는 "저"라고 나와 있는데, 이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여기서 "형제"라고 불러 주시는 대상은 바로 우리 기독신자들입니다.

이것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과 결코 동등하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이라고 깍듯이 극존칭으로 불러 마땅한 분이신데, 그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형제'라고, 지극히 격 없고 친근한 호칭으로 일컬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제 수난주간과 부활절을 앞에 두고 더욱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이 뜻 깊은 계절에 저는 주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우리 성도들을 형제로 사귀어 주고 계시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성도와 형제처럼 교제해 주십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 "11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죄인의 더러운 것들을 다 속하시고 완전히 깨끗하게 만드심으로써 이 '거룩하게 하시는 자'의 사역을 완수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란 두말할 것 없이 그 그리스도의 대속 은총을 입게 된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그런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신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 했습니다.
서로 '형제'라 불릴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원래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가족은 아닐지라도 그에 상응할 만한 어떤 공통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즉 이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가 서로 형제가 될 수 있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 되는 '하나'란 바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성도들이 다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예수님도 창조하셨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죄인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는 사역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출발된 것이며 성도들 역시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게 된 자들인 까닭에 둘 다 '하나에서 났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당연히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 '거룩함을 입은 자'들보다 월등히 더 거룩함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게 된 성도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을 입게 된 것이라고까지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이 완전한 성화 즉 '영화' 상태에 도달할 때 현실화될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만 해도 황송스럽기 짝이 없는데 곧 이어서 정말 기절초풍할 만한 말씀이 또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원래 원문에 따르면 이 문장의 주어는 정확하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거룩하게 해 주시는 자들'을 이제는 아예 '당신의 형제'라고 불러 주시는 것까지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했으니, 원래는 당연히 부끄러워하실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같이 완전무결하신 성자께서 어떻게 우리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들을 형제로 쳐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게 심히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임에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형제라고 불러 주시기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했으니, 이것은 우리로서는 그저 감지덕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12절에 이어지는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라는 말씀은 시편 22편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다윗이 온갖 환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 후에 그 하나님을 형제들 앞에서 찬송할 것을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편 22편은 궁극적으로는 오실 메시아를 예표한 예언적인 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이 '내'라는 1인칭이 바로 앞절에 나왔던 '거룩하게 하시는 자' 곧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의미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12절을 다시 보시면 우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성도들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시면서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이름'을 '당신의 형제처럼 여겨 주시는 성도'들에게 몸소 선포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특별계시를 통해 원래 죄인이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찾지도 않고 오로지 멀리하기만 하던'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성호와 그 주권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선포가 행해지고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이어지는 12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내'라는 주어 역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우리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 놀랍고 신기한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저 하늘 보좌 우편에 점잖게 앉아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 당신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성도들이 이 땅의 교회에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송할 때 바로 그 찬송을 함께 따라 불러 주시는 분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귀에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지라도, 저와 여러분이 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고백하고 그 전지전능하심에 영광을 돌리고 있을 때에 우리 예수님 역시 바로 이 회중에 영으로 함께 임하시면서 같이 화답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형제지간'의 교제를 구체적으로 나누게 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친형제라면 당연히 같이 사는 집이 있고, 친형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면 자주 만나서 교제하는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서 그런 형제의 교제가 일어나는 집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이 낮고 천하고 더러웠던 죄인이 감히 '성자 하나님'과 형제처럼 교제할 수 있는 놀라운 장소입니다.
이곳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양자'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둘 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서 함께 살고 있는 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해 주십니다.
그것도 그냥 우리가 느낄 수도 없게 무슨 귀신처럼 몰래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 예배 중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친히 선포해 주시고 그 예배당 안에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호를 찬송할 때 함께 '교회 중에서 찬송'을 불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벌레만도 못한 죄인에 불과한 나를 '한 하나님에게서 난 형제'라고 불러 주시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이런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성도 교제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한 교회 안에 있지만, 같은 교구와 전도회에 속해 있지만 나보다 학력이 좀 낮고 생활수준이 좀 낮은 교우와는 은근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교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거룩하게 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함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형제자매'가 된 것을 진정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런 '예수님의 형제자매'답게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먼저 대접하고 섬기는 겸손의 교제가 당연히 나누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우리 경향교회가 곧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과 '거룩하게 됨을 입은 성도'가 다 '한 하나님에게서 한 형제'로서 교제하고 있는 실로 은혜로운 '하나님의 집'인 것을 이곳에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늘 확신하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는 '화육과 대속'을 통해 당신의 형제 된 성도에게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로 13절 이하 18절에 기록하기를 "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선 13절은 이사야 8장 17절과 18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이것 역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 완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는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지만 그 모든 것을 오직 '성부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완수하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라는 말씀 역시 우리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결과 예수님과 '형제'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14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은 그처럼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당신의 형제로 삼아 주신 예수님의 '화육강세'와 '대속 사역'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14절 상반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는 "혈육" 즉 '피와 살'로 조직되어 있는 육체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현실적인 연약과 한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의 약점을 철저하게 스스로 체험해 보시기 위해서 육체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런 철두철미한 '화육'의 이유를 가리켜 14절 하반절에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망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망을 직접 겪으심으로써'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 져서' 사망을 겪게 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사람들에게 사망을 가져다주려 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완전히 분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사람들의 죄값인 사망을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대속적인 사망을 당하시기 위해서 '살과 피'까지 친히 입으심으로써, 그 살의 찢김을 통해 느끼게 되는 죽음의 고통, 그 피 흘림을 통해 이르게 되는 죽음의 고난까지 조금도 남김없이 우리 사람과 똑같이 당해 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이처럼 '혈육에 함께 속하시면서까지' 사람과 똑같이 당하려 하셨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15절에서 그 이유를 밝혀 주기를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일평생 내내 이 '살'이 가지고 있는 연약,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가 가지고 있는 약점, 그것이 살 속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지 못하거나 항체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면 병약하게 되고, 상처가 생겨 그것을 많이 흘리게 되어도 죽게 되는 그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도 늘 병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현실에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취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 사람으로 하여금 사망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살과 피의 몸까지 입으신 가운데 그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대속의 죽음과 생명의 부활까지 성취하셨습니다.
즉 그런 유한적이고 불안한 육신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 육체가 가져다주는 죽음 때문에 떨지 아니하고 그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하여 영생까지 누리는 소망을 든든히 붙잡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의 '화육강세의 비하'와 '십자가의 대속사역'은 16절에 이어지는 대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라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 즉 만세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 만을 위하여 베푸신 최고의 사랑, 더 이상 베풀 길이 없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요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말 가면 갈수록 더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말씀이 이어지는데, 그 다음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마땅하다'라는 단어는 '꼭 필요하다. 필연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따져 본다면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이 낮고 천한 죄인과 '같이 되신다는 것'은 결코 '마땅한' 일이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오히려 '마땅한 일'로 생각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17절 하반절과 18절이 설명해 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죄를 구속, 즉 대신 값아 주실 대제사장'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바로 그 뜻을 받들어 사람의 몸을 입고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통한 '대속'까지 성취해 주심으로써, 실로 '죄인에게 자비하시고' '성부께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속이 깊으신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 행동 없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상태로 그냥 말로만 '내가 너희 죄를 다 사해 준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셔도 그 죄 사함의 효력은 여전히 발휘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아예 원래 '영'이셨던 당신의 존재에 우리 사람의 '살과 피'를 친히 채워 넣으시고서 그 구속 사역을 성취해 주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직접 자기 몸으로 겪어 보기 전에는 '몸으로 때워야 하는' 사람의 형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펜대만 굴리고 있는 사람이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야 하는 사람의 형편을 이해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이 육신 때문에 약하고 이 육신 때문에 괴롭고 이 육신 때문에 마귀의 권세에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는 우리들의 불쌍한 형편을 충분히 이해해 주시고 또한 거기에서 완전히 건져내 주시고자, 당신께서도 친히 '몸으로 체휼해' 보시면서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법적으로, 그 무엇을 두고 생각해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오히려 '마땅한 일'로 생각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역시 죄인 대속과 구원을 위해서는 당신께서 친히 화육강세하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살과 피를 가진 사람과 똑같이 당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이것은 당신께서 죄인의 '형제'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 주셨습니다.
정말 우리 예수님께서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랍고도 고맙기 그지없는 '형제 사랑'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던 우리 같은 사람과 아예 '범사에 같이 되시기 위하여 온갖 인생의 고난들까지 친히 다 체휼해 보시기까지' 해 주셨는데도, 우리가 '자기 십자가'라는 지극히 작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그저 빈손으로, 맨입으로 편안하게 예수님 뒤를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당신의 살과 피까지 몽땅 우리 대신 바치신 것을 지극히 마땅하게 여겨 주시기까지 하신 이 사랑의 예수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새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된 것을 깨닫는다면 이제 우리 역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그의 자녀'들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혈과 육'으로 된 까닭에 연약할 수밖에 없고 사망의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해 주시려고 친히 '화육강세'를 통해 우리와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해' 주셨으며 '십자가 대속'을 통해 그 고난의 죽음을 대신 당해 주신 이 엄청난 예수님의 '형제 사랑'을 진정 감사하며 뜨겁게 찬양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 참으로 놀라운 초청을 받고 실로 신기한 은총을 누리게 된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죄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함께 입은 양자'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땅한 일'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던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내 형제'라고 불러 주시는 위치에까지 격상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말로 표현조차 다 할 수 없으며 그야말로 '고소원불감청'에 불과했던 '예수님과의 교제'를 바로 이 교회를 통해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통해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형제 사랑'은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기'까지 하시면서 사람과 같은 '고난'을 당하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사망'까지 당하신, 실로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사랑'입니다.
석가모니는 자기 혼자 무슨 득도라는 것을 통해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제자들에게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자기처럼 되라고 하고 죽어 버렸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의 고통까지 친히 겪어 보시는 '임마누엘'이 되심으로써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시는' 친구로 가까이 동행해 주고 계십니다.
마호메트는 '칼이냐 코란이냐?'라고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억지로 자기의 신도로 만들었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괴수'인 날 위해 친히 십자가까지 지시는 전무후무한 구세주가 되심으로써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친히 선포하셨던 그 사랑을 우리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호형호제'하는 친구 사이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이라고 부르는 혈연관계라 해도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장 친밀하고 행복한 교제를 저와 여러분은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그 예수님과 뜨겁게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를 '하나에서 난 형제'로 불러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범사에 우리와 같이 시험과 고난까지 당하신'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날마다 더 가까이하고 친근히 사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경향교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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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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