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분노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Living in our age of rage)을 9월 14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990년대 초반, 폴 라이저(Paul Reiser)와 헬렌 헌트(Helen Hunt)가 주연한 시트콤 <매드 어바웃 유(Mad About You)>가 있었다. 관계와 사랑, 결혼,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갈등을 다룬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문화적 드라마를 바탕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제목은 아마 <모든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Mad About Everything)>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에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가 싫다고 분노하고, 마가(MAGA) 성향을 보인다고 비난하며, ‘Woke’하다고 공격한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몰아내거나 취소하려 한다. 의견 차이는 점점 토론의 이유가 아니라 적대의 근거가 되어간다.

법학 교수이자 작가인 조너선 털리(Jonathan Turley)는 자신의 저서 『필수불가결한 권리: 분노의 시대와 표현의 자유』에서 오늘날의 적대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는 미국 사회가 ‘분노에 중독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하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분노가 주는 심리적 해방감을 꼽는다.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에게는 잠시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털리는 분노가 종종 이성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사실을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상대편의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오히려 분노를 더욱 키우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본다. 한쪽에서는 세상의 문제를 특정 정치인이나 집단의 탓으로 돌리고, 반대쪽에서는 모든 문제를 다른 진영이나 이념의 책임으로 돌린다. 상대는 더 이상 생각이 다른 시민이 아니라 위험한 존재나 제거해야 할 적으로 묘사된다.

정치인들 역시 분노가 이성적 설득보다 훨씬 강력한 동원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분노한 유권자는 더 자주 정치 콘텐츠를 공유하고, 더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시위에 참여하고, 투표장에 나간다. 자신이 위협으로 여기는 대상을 물리쳐주겠다고 약속하는 정치인에게 강하게 결집하기도 한다.

그 결과 정치적 메시지는 점점 두려움과 분노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상대 진영은 동료 시민이 아니라 위협으로 묘사되고, 새로운 논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끝없는 전쟁의 또 다른 전투처럼 포장된다. 분노는 정치를 부족주의로 바꾸고, 부족주의는 반대편을 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분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극한 군중의 분노가 언제든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분노는 한번 커지기 시작하면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성경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분노한 군중’이 등장한다. 그리고 성경은 집단적 분노가 얼마나 빠르게 사람의 판단을 흐리고 행동을 뒤바꿀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 군중을 이루는 사람들이 모두 원래부터 폭력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종교인과 정치인, 사업가와 평범한 시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분노가 집단적으로 증폭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사도행전 14장에 등장한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친다. 이 광경을 본 군중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며 제사까지 드리려 한다(행 14:8-18). 처음에는 열광적인 환호였지만, 바로 뒤이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이 군중을 설득하자, 그들은 갑자기 바울에게 돌을 던지고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낸다(행 14:19). 같은 군중이었고 같은 바울이었지만,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은 열렬한 지지자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군중으로 변했다.

사도행전 19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해 우상 제작 산업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그는 종교적 감정과 경제적 불안을 동시에 자극했고, 결국 거대한 군중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다(행 19:34).

그런데 성경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인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행 19:32)

군중의 상당수는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모였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었고, 자신도 그 분노에 휩쓸렸을 뿐이다.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어떤 논란이 벌어졌을 때 사실관계를 충분히 확인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신의 진영에 따라 반응하기 시작한다. 질문은 점차 “무슨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에서 “너는 누구 편인가”로 바뀌고, 분노가 커질수록 진실은 뒤로 밀릴 수 있다.

듣기는 속히, 성내기는 더디 하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야고보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원칙을 제시한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이 말씀은 분노한 군중의 습성과 정확히 반대다. 분노한 군중은 듣기는 더디 하고, 말하기는 속히 하며, 성내기는 더욱 빠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에게 정반대로 행동하라고 권한다. 먼저 듣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며,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도 분명하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옳은 이유로 화가 났더라도 그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은 잘못될 수 있다.

분노는 전염된다

잠언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말을 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오늘날 소셜미디어의 작동 방식을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분노는 전염된다. 거친 말은 더 거친 말을 낳고, 모욕은 모욕을 부르며, 비난은 또 다른 비난으로 이어진다. 대화의 온도가 계속 올라가면 처음 무엇 때문에 논쟁을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서로에 대한 분노만 남게 된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비슷한 권면을 한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이 말씀은 오늘날 더욱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빠르고 날카로운 반응이 주목을 받고, 상대를 논리적으로 이기는 것보다 조롱하는 문장이 더 많이 공유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온유함을 약함으로, 절제를 비겁함으로 오해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다르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온유할 수 있어야 하고, 강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모욕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조차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분노 자체가 언제나 죄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에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분노 자체를 언제나 죄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26)

불의 앞에서 분노할 수 있고, 약자를 향한 폭력과 착취, 거짓과 부패를 보며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분노가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다. 정의를 위해 분노하다가 어느 순간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될 수 있고, 진리를 지키려다가 그 진리를 말하는 방식에서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 악을 미워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미워하던 바로 그 악의 방식을 닮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악에 맞서면서 스스로 악해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을 잃지 않으면서 진리를 수호하고,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으면서 거짓에 맞서야 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분노의 세상을 통과하셨는가

그리스도인이 분노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님은 불의 앞에서 침묵만 하신 분이 아니었다. 위선을 책망했고, 성전의 타락에 분노했으며, 권력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자신이 모욕당할 때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증오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모습이다.

분노의 시대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우리 시대는 분노를 보상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가장 격렬한 말이 가장 많은 관심을 얻고, 가장 적대적인 콘텐츠가 가장 빠르게 확산되며, 상대방을 가장 강하게 공격하는 사람이 가장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운다면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무엇이 다른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악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하고, 반대편을 경멸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수호할 수 있어야 하며, 분노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면서도 불의 앞에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그리고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있을 때조차 그 분노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분노의 시대에 이것은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증언이 될 수 있다. 세상이 “누구 편인가”를 묻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진실인가”를 물을 수 있고, 세상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할 때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임을 기억할 수 있다. 세상이 분노를 부추길 때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사랑, 정의와 절제를 함께 붙들 수 있다. 바로 그것이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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