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전쟁 발발 직후 국내 석유제품 공급 가격을 담합한 혐의를 받는 국내 4대 정유사와 일부 임직원이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6일 현대오일뱅크,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4개 회사를 공정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현대오일뱅크 가격결정부서 부서장 A씨와 책임매니저 B씨, 법무실장 C씨, GS칼텍스 국내영업 부문장 D씨도 함께 기소했다. A씨는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정유사 임직원들의 수사 협조 정도와 범행 가담 수준 등을 고려해 일부 관련자만 기소했다고 설명했다. 자진신고자 감면 제도인 리니언시도 일부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국내 정유사들이 전쟁에 따른 국제유가 불안 상황을 이유로 석유제품 가격을 동시에 인상했는지 여부다. 검찰은 가격 급등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일부 정유사가 가격 정보를 교환하고 공급 가격을 인상했다고 보고 있다.
“전쟁 직후 가격 급등 불가피하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는 2024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가격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가격 정보를 교환한 혐의를 받는다. 두 회사는 정유업계 가격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사업자로, 검찰은 이들이 가격 인상 구조를 사실상 주도했다고 판단했다.
현대오일뱅크와 A씨는 미국·이란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 3월 SK에너지 가격결정부서 부서장과 석유제품 가격을 대폭 인상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당시 SK에너지가 현대오일뱅크보다 리터당 30~40원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으로 가격을 일괄 인상하기로 했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전쟁 직후 국내 정유사들이 일제히 공급 가격을 인상한 점을 이례적으로 판단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는 발발 첫날 유가가 오히려 하락한 뒤 약 일주일이 지나 상승세를 보였지만, 이번에는 발발 당일부터 정유사들이 동시에 가격을 올렸다는 것이다.
수사 결과 전쟁 발발 당시 정유사들은 이미 상당량의 원유를 비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이에 따라 석유제품 가격 급등이 반드시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담합 규모 14조 원…경쟁제한 효과 26조 원
검찰은 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의 가격 담합 규모가 14조2000억 원에 이른다고 봤다. 여기에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의 가격 추종 행위에 따른 파급 효과까지 포함하면 약 26조 원 규모의 경쟁 제한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다.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직접 담합에 참여했다기보다 경쟁사 가격 인상을 추종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이들 회사가 가격 결정 과정에서 경쟁사 가격을 핵심 참고 요소로 삼고 있으며, 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가 가격을 올리자 이를 따라 공급 가격을 인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이러한 행위가 경쟁 질서를 교란하는 전형적인 의식적 병행 행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공정거래법상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어서 해당 부분은 기소 범위에서 제외됐다.
검찰 수사에서 회사 경영진 등 윗선이 담합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사팀 관계자는 “윗선도 상황상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면서도 “관련자 휴대전화 100여 대를 압수해 분석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유소 전량구매계약도 공정거래법 위반 적용
검찰은 4대 정유사가 주유소와 체결한 전량구매계약에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이들 회사는 2021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주유소들과 전량구매계약을 맺고,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자사 제품만 구매하도록 한 혐의를 받는다.
검찰은 이러한 관행을 거대 정유사가 경제적 약자인 자영 주유소를 상대로 한 ‘갑질’로 규정했다. 자영 주유소의 사업 운영이 정유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유통 구조라는 취지다.
검찰에 따르면 정유사들은 주유소에 공급 가격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타사 제품을 공급받은 주유소에는 손해배상 청구, 비용 회수, 보너스카드 중단 등 불이익을 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에 기소된 4개 정유사는 모두 계약서에 전량구매 위반 시 해당 주유소의 반기 또는 분기별 매출액의 10~30%를 손해배상 예정액으로 규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이로 인해 자영 주유소들이 더 저렴한 석유제품을 공급하는 다른 거래처와 거래할 기회가 차단됐다고 지적했다.
자료 삭제·산업부 허위보고 혐의도 확인
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는 공정거래위원회 현장조사 사실을 사전에 알고 내부 자료를 삭제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상당량의 증거자료가 이미 유실된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현대오일뱅크 법무실장 C씨는 공정위의 현장조사 사실을 미리 파악한 뒤 경쟁사 가격 정보가 담긴 전산 자료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GS칼텍스 국내영업 부문장 D씨는 현장조사를 앞두고 가격 관련 사내 메신저 대화를 삭제하도록 조치한 정황이 드러났다.
또 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 에쓰오일은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유가 교란 행위를 숨기기 위해 산업통상자원부에 판매가를 낮춰 허위로 보고한 사실도 확인됐다. 검찰은 이들이 두 차례에 걸쳐 실제 판매가와 다른 내용을 보고했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정유사들이 가격 결정에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진 구조도 문제로 지적했다. 시간차를 두고 공급 가격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관행과 상시적으로 타사 가격을 모니터링해 따라가는 가격 결정 방식이 정유사 간 정보 교환과 담합을 용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국가적 혼란 틈탄 유가 교란 범죄”
검찰은 이번 사건을 국가적 혼란을 틈탄 중대 범죄로 보고 있다. 국제 정세 불안으로 에너지 가격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국내 정유사들이 가격 담합과 유통 구조 왜곡을 통해 소비자 피해를 키웠다는 판단이다.
검찰 관계자는 “국가적 혼란을 틈타 유가를 교란한 중대한 범죄”라며 “죄에 상응하는 형이 선고될 수 있도록 공소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유관기관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도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번 수사 결과를 유관기관과 공유하고, 정유업계 가격 결정 구조와 주유소 전량구매계약 관행 등과 관련한 제도 개선 논의에도 협조할 방침이다.
이번 기소로 4대 정유사의 석유제품 가격 담합 혐의와 주유소 전량구매 관행, 조사 방해 의혹은 법정에서 다뤄지게 됐다. 향후 재판에서는 가격 정보 교환과 공급가 인상 합의 여부, 주유소 계약 관행의 위법성, 자료 삭제 및 허위보고 혐의 등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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