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샘 이튼 작가의 기고글인 "‘기도만 더 하라’는 말이 우울증과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가 되는 이유"(Why saying 'just pray more' is harming Christians battling depression)를 6월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샘 이튼은 작가이자 전국적으로 알려진 강연가이며, 자살 예방 단체인 ‘레클리스리 얼라이브 재단(Recklessly Alive Foundation)’의 설립자다. 그는 자살로 인한 사망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사역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서 250회가 넘는 행사에서 강연하며, 우울증을 극복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의 삶에서 어느 한 시기, 필자는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치 두 개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필자는 예배에 일찍 참석했고, 찬양도 다 알고 있었으며,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숙여 기도했다. 누군가 잘 지내냐고 물으면, 아무 생각 없이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시끄럽거나 극적이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요했다. 무거운 짓눌림이 집까지 필자를 따라왔고, 차 안에서도 필자 곁에 앉아 있었으며, 밤에 불을 끌 때도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그 감정을 설명할 단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평안을 필자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그래서 필자가 마침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고 속마음을 꺼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기도를 더 해봐." "말씀을 더 가까이 해." "하나님께서 이겨내게 해주실 거야."
필자도 그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들은 필자를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필자 역시 그 방법이 통하기를 바랐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가 그들이 조언한 대로 정확히 실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무거운 마음은 걷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단지 힘든 것을 넘어, 스스로 신앙생활에 실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더 조용해졌다. 미소는 조금 더 지었고, 속마음은 덜 나누게 되었다. 이것은 필자 혼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레짐작해버렸다.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모른다
교회는 정신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꽤 진전을 이루었고,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울증, 불안, 번아웃, 그리고 절망이 우리 교회와 가정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누군가가 마침내 "나 지금 안 괜찮아요"라고 말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늘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문제를 짚어내고 거론하는 데는 능숙해졌지만,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주는 데는 아직 그만큼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너무 자주,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것으로 축소해 버린다.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영적인 정답을 내밀며, 그것이 원래 지닌 무게보다 더 큰 위로가 되어주기를 무작정 기대한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곁에 있어 주는 '존재(presence)'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성경 구절 하나를 들이밀곤 한다.
암 환자에게도 이렇게 말하겠는가?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그것이 암이었다고 해도 우리는 이렇게 반응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암 진단을 받았다면, 성경 몇 구절을 읽어보라고 한 뒤 다음 주에 다시 확인해 보자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의 결과가 그날 아침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에 달려 있다고 넘겨짚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기도하겠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식사를 챙겨다 줄 것이다. 병원 대기실에 함께 앉아 있어 줄 것이다. 좋은 의사를 찾도록 도울 것이다. 계속해서 안부를 묻고 챙길 것이다. 그들이 직면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혼자서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우울증 역시 이와 똑같은 진지함으로 대해야 마땅하다.
우울증과 암이 똑같은 질병이라서가 아니라, 두 가지 모두 가벼운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두 질병 모두 사람을 극도로 지치게 하고, 방향 감각을 잃게 하며, 두려움에 빠뜨릴 수 있다. 그리고 두 상황 모두, 주변 사람들이 말뿐인 위로를 넘어 진짜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것은 단지 영적인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다
성경도 우리를 이 방향으로 안내한다. 엘리야가 절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훈계부터 늘어놓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안식과 음식, 그리고 온유함으로 그를 만나주셨고, 그 후에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위한 새로운 말씀을 주셨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담긴 돌봄의 참모습이다. 영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돌봄인 것이다.
스트레스, 트라우마, 슬픔, 탈진, 고립, 그리고 뇌의 화학적 반응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 시스템이 무너져 내릴 때, 모든 것이 훨씬 더 힘겹게 느껴진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승리처럼 느껴질 수 있다. 희망은 아득히 멀어 보이고, 거짓말들이 진실처럼 들리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도는 중요하지만, 오직 기도만이 그 사람에게 필요한 유일한 도움의 형태인 것은 아니다. 믿음은 그들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성경은 생각이 요동칠 때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되어줄 수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그들 스스로 희망을 품을 수 없을 때 대신 희망을 품어줄 수 있다. 그러나 진실한 돌봄이라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진정한 긍휼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가 성경적인 긍휼로 우울증에 반응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돌봄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할 때 그들이 짊어진 짐을 축소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들의 말을 온전히 믿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편의를 구하는 시간을 넘어, 기꺼이 그들 곁에 더 머물러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안부 문자를 한 번 더 보내고, 다시 전화를 걸며, 누군가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알아차려 주는 것을 뜻한다. 또한 도움을 구하는 것을 믿음이 약한 증거인 양 취급하는 대신, 그들이 상담사, 목회자, 의사,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친구와 연결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도를 더 해보세요"라는 말은 "돌아오기 전에 이 문제부터 스스로 해결하세요"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겨내게 하실 겁니다"라는 말이 진리일지라도, 잘못된 타이밍에 건네지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더 나은 반응은 대개 더 단순하게 들린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곁에 있어요."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돼요." "오늘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이 말들은 진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주기 전에 사랑을 먼저 전달함으로써, 진리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교회와 사역 지도자들에게 이는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우리의 사역이 희망을 설교할 줄은 알지만 고통받는 자와 함께 앉아 있는 방법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결국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먼저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함께 해낼 수 있다
교회는 고통에 관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깊은 슬픔을 체휼하셨고, 서로의 짐을 지라고 가르치신 구주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도하라. 성경을 펴라. 희망을 말하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라.
하지만 동시에 식사도 챙겨주라. 침묵 속에서 곁에 앉아 있어 주라. 병원 예약을 돕고, 다음 주에 또 안부를 물어라. 명쾌한 해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 곁에 머물러라.
우울증과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의 진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곁에 있어 주는 우리의 존재'가 절실하다.
그리고 만약 우울증에 대한 우리의 조언이 암 환자에게 베풀고자 하는 돌봄의 무게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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