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9년 고된 광주 육군 보병학교를 졸업했었다. 그리고 중위로 임관하여 첫 보직으로 26사단 76연대의 군목이 되었다. 당시 연대장은 육사 10기생인 김창일 대령이었다. 나는 전입 신고를 위해 김창일 대령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신고를 하려는데, 연대장님은 내게 “목사님이 무슨 신고를...” 하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김창일 대령은 작은 키에 뚱뚱했지만, 군에서는 알려진 작전통으로 대단한 분이었다.
얼마 후 군종과에 군종 사병이 들어왔다. 그는 180cm도 훨씬 넘는 황신권 일병이었다. 나의 작은 키에 비하면 그는 태산처럼 커 보였다. 얼마 후 황 일병의 아버지가 면회를 왔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한국 군종병과>를 창설하신 황금천 목사님이었다. 황금천 목사님은 키가 장대하고 체격이 거인에 속한 분이다. 거기다 그의 음성은 더블 바리톤에다,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사전에 연대장님에게 황금천 목사의 방문을 알렸다. 그러자 연대장님은 부대 입구까지 마중 나왔고, 황금천 목사는 연대장님에게 우렁찬 목소리로, “나 일군 창설 참모 황금천이요!”하고 그 큰 손을 내밀었다. 그날따라 연대장님이 왜 그렇게 왜소해 보였는지... 그렇게 황금천 목사님을 찝차에 태웠는데, 황 목사님이 찝차에 올라타자, 차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황금천 목사님은 거인이요, 거목이었다. 나는 일찍이 그의 설교를 듣고, 서대문 홍천교회의 목사님 댁에서 1박을 한 적도 있었다. 황금천 목사님은 대 전도자요, 대 행정가요, 웅변가였다. 그의 생애는 영혼 구령에 전심이었고, 나라 사랑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신조는 언제나 긍정적이었다. 모든 결정에는 “하자” “좋다”라고 상대방을 세워주는 전도자였다. 그는 체격만 거인이 아니라, 영적 거인이었다. 황 목사님은 황해도 출신이다. 장로 교단에서는 이환수, 박찬목, 장성칠 목사 등과 함께 황해도의 정통 기독교 맴버였다. 일찍이 평양 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 아래서 사사했지만,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로 평양 신학교가 폐교되자, 박형룡, 박윤선 박사가 세운 만주 봉천 신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졸업했었다.
황 목사님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괴뢰군의 불법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군목이 없던 시절, 그는 즉시 ‘기독교 구국회’를 창설하시고,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에 이바지하기 위해 생명을 내걸었다. 그는 총무의 중임을 맡아 ‘十字軍’을 편성해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했다. 그 후 UN군의 출동과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고 계속 북진했다. 그리고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했던 백선엽 장군의 평양 수복 시에 최전방의 UN군과 함께 황금천 목사님은 1950년 10월 20일, 평양 숭실학교 교사를 찾았다. 그리고 황금천 목사님은 평양 탈환 시, 이승만 박사의 평양 수복 연설에 함께 했었다. 그러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군은 다시 남하하여 제주도까지 피난해야 했었다. 제주도에서 황금천 목사님은 또다시 피난민 구제 사업을 위해서 제일선에서 뛰었다.
그렇게 전투가 아직도 폭열하던 때인 1951년 2월 2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목사들이 군부대에 들어가 전도할 수 있게 하라!’는 특령을 내려 ‘軍牧 制度’가 창설되었다. 황금천 목사님은 당연히 1기생으로 훈련받으시고, 군종 장교로 임명되었다. 황 목사님은 이전에도 군목 격으로 일했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 군목의 사명을 띄고 활약하게 된다. 당시 동기생으로 장로교는 황금천 박치순 박봉랑 조향록 김형도였고, 감리교는 윤창덕 박대선(전 연세대 총장), 성결교는 최익현이 있었다.
황 목사님이 처음으로 배속된 곳은 육군 1사단 본부였다. 당시는 군목 제도가 처음 실시 된 때라, 장성들 중에는 이 제도에 대한 시비도 있었지만, 황금천 목사의 활약을 보고서 하는 말이 “군목이 되려면 적어도 황금천 목사님 정도는 되어야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황금천 목사는 군계일학(群鷄一鶴)적으로 초기 군목으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 후 황금천 목사님은 육군 본부 장로교 군목 대표로, 대구에서 육군본부 군인교회를 창설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군목들은 현역으로, 계급도 없이 복무하고 있었기에 기독교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그렇게 군목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에 황 목사님은 ‘대표 군목’으로 역할을 잘했었다. 1952년 그는 ‘군종감’으로 세워졌다.
황금천 목사님은 ‘십자군 운동’ ‘군 선무 운동’ ‘초대 군목’으로 사역하다 현역에서 물러난 후에도, ‘군목 지원 사업’에 일생을 바쳤고, 나라 사랑, 국군 사랑의 화신이었다. 그는 1976년 9월 20일, 총신대학교 대강단에 모인 61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그렇게 동분서주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했는데, 1977년 2월 11일, ‘크리스챤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개최된 벧엘 성서 연구회 종강예배 시, 웅장하고 불을 토하며 설교하던 중 순직했었다.
그의 이름대로 그는 황금의 샘이 되어 나라가 위기의 순간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온몸을 던져 군 선교의 최일선에서 동분서주하던 초대 군목이었다. 그리고 500개 교회를 개척한 대 전도자요, 대 부흥사요, 영적인 거장이었다.
그렇게 황금천 목사님은 군종병과의 크나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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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