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칼 R. 트루먼 교수의 기고글인 ‘내가 알던 영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The England I knew is gone)를 9월 9일 (현지시각) 게재했다.
트루먼 교수는 그로브 시티 칼리지의 성서 및 종교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종교 및 공공 생활 분야의 윌리엄 E. 사이먼 펠로우로 재직한 바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L. P. 하틀리(Leslie Poles Hartley)는 “과거는 낯선 나라(a foreign country)와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올여름 필자는 난생처음으로 ‘현재’ 역시 낯선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린 시절과 청춘을 보낸 고국을 해마다 방문할 때마다, 필자는 자신을 길러낸 과거의 문화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현대 영국의 모습을 마주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영국에서 그래머 스쿨을 다니며 성장한 필자는 개인적인 절제와 공공장소에서의 감정 통제, 사생활의 존중,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정직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태도, 그리고 타인의 사회적 지위나 의견과 관계없이 그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자연스럽게 배웠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러한 덕목은 언론과 종교, 표현의 자유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가치들이 오늘날 상당 부분 퇴색했다. 적어도 국가의 풍속과 도덕을 규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 계층 안에서는 그렇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영국 문화가 단절되는 변곡점에서 성장했던 것 같다. 필자는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운 마지막 세대 가운데 하나였고, 컴퓨터 공학을 배우지 않은 마지막 세대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고전 학문은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기술 관료적 사고방식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필자가 소장한 『루이스 앤 쇼트(Lewis and Short)』 라틴어 고전 사전은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학교 비품이었던 이 책은 필자가 졸업할 무렵 학교 측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며 건네준 것이었다.
낯설어진 고국
올해 초 필자는 영국이 얼마나 다른 나라로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한 사건을 접했다. 네덜란드의 젊은 정치인 에바 플라르딩어브루크(Eva Vlaardingerbroek)의 영국 입국이 거부된 일이었다.
필자의 여동생 가운데 한 명은 그녀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영국 입국이 거부됐는지 알아보기 위해 AI 챗봇에 질문했다. 흥미롭게도 챗봇은 그녀가 대중 강연에서 필자의 저서를 종종 언급해 왔으며, 두 사람 모두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에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혀온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이 특히 아이러니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영국 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를 받아들이면서, 일부 입국자들에게 영국 사회의 기본적인 법과 문화적 규범을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왔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당연하다는 것, 성관계에는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 이를 어길 경우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필자에게 묘한 역설로 다가온다. 생물학적 성에 관한 전통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힌 유럽의 보수 정치인은 환영받지 못하는 반면, 서구 사회의 기본적인 법적·문화적 규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받아들인 뒤 다시 그 규범을 교육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자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어떤 가치와 기준을 우선시하고 있는가에 있다.
‘표현적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오늘날 영국은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가 정치와 문화의 상상력을 장악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됐다.
표현적 개인주의의 핵심에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가 외부의 규범이나 전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되고 표현돼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다. 이 관점에서 과거의 사회적 규범이나 전통은 종종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간주된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의 자기표현이 다른 사람의 종교적 신념이나 표현의 자유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는 이 충돌 속에서 질서와 기준을 정해야 한다.
표현적 개인주의가 문화의 지배적인 원리가 될 경우, 기존의 규범을 유지하려는 사람보다 그것을 해체하려는 사람이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기 쉽다. 전통은 억압으로, 규범은 차별로, 절제는 자기부정으로 재해석된다. 그 결과 어제의 미덕이 오늘의 악덕으로 바뀌는 도덕적 역전 현상이 나타난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트라우마’라는 말의 의미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현상이다. 실제로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가리켜야 할 개념이 때로는 “누군가 나에 대해 불쾌한 말을 했다”거나 “내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수준의 경험까지 포괄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과정에서 불편함과 피해, 반대와 폭력 사이의 구분이 점점 흐려질 위험이 있다.
교회도 이 문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시 이러한 문화적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 영국 학계와 언론을 둘러싼 여러 논쟁에서도 이 새로운 도덕 감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제기된 사실 검증의 문제보다 정체성과 정치적 의미가 더 크게 부각되면서, 언론과 학계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진실을 검증하려는 행위 자체가 특정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는 분위기다.
대학이나 언론, 공공기관이 신뢰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사실과 자격, 책임의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학자가 특정 직책을 맡는다면 그 직책에 필요한 자격과 능력을 갖췄는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개인의 인종이나 성별, 정체성을 공격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검증조차 정체성 정치의 프레임 안에서 해석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서구 전체에 나타나는 ‘품위의 쇠퇴’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보다 넓은 서구 사회의 문제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고위 정치인이 공개 석상에서 노골적인 욕설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 품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거친 표현과 욕설을 사용하는 일이 훨씬 흔해졌다. 바이든 행정부와 트럼프 진영 모두에서 그런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구시대적 예절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소한 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더 큰 문화적 변화의 작은 징후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자기 통제와 겸손, 타인에 대한 존중, 절제된 언어와 공적 품위처럼 과거 영국 사회가 중요하게 여겼던 덕목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칠고 즉흥적인 자기표현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 문제는 어느 한 정치 진영만의 책임이 아니다.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표현적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정치적 분노를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고, 절제를 위선으로 여기며, 거친 언어와 공격성을 진정성이나 용기의 증거로 착각하는 모습은 정치 스펙트럼 양쪽에서 모두 나타난다.
그렇다면 문제의 본질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우리가 ‘품위(decency)’라는 개념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알던 영국은 어디로 갔는가
필자는 당분간 두 개의 여권을 모두 유지할 생각이다. 물론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입국이 거부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필자가 어린 시절 알고 있던 영국과 오늘날의 영국 사이에 생긴 깊은 문화적 간극을 상징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국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에도 불의와 위선, 편견과 차별은 존재했다. 과거를 낭만적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거의 모든 가치가 폐기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절제와 공정함, 정직과 사생활 존중,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 그리고 진실을 말할 자유는 낡은 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다원주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한 사회가 자신의 전통적 도덕 언어를 버릴 때, 그 빈자리가 자동으로 더 관용적이고 자유로운 가치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금기가 생기고, 새로운 정통성이 등장하며, 새로운 종류의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하틀리의 말처럼 과거는 낯선 나라다. 그러나 필자가 올여름 깨달은 것은 조금 달랐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떠나온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돌아온 나라에서 낯선 이방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에게 오늘의 영국은 점점 그런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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