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P. 페트리 박사
데니스 P. 페트리 박사. ©petri.phd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데니스 패트리 박사의 기고글인 ‘탈기독교 시대의 유럽 교회는 박해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중을 잃어가고 있다’(The Church in post Christian Europe is not being persecuted but it is losing respect)를 5월 1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니스 P. 페트리 박사는 국제종교자유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Religious Freedom)의 국제 책임자이며, 라틴아메리카 종교자유 관측소(Observatory of Religious Freedom in Latin America)의 설립자이자 상임 연구위원이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과학기술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여러 저서의 저자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지난주 유튜브 알고리즘 덕분에 필자는 흥미로운 보고서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작년 4월 영국 국가교회신탁(National Churches Trust)이 발표한 이 보고서의 헤드라인은 필자의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바로 "단 3년 만에 영국 교회에서 9,000건 이상의 범죄 발생"이라는 내용이었다.

수치는 노골적이었다. '카운트리사이드 얼라이언스(Countryside Alliance)'가 정보 공개 청구를 통해 집계한 바에 따르면, 2022년에서 2024년 사이 영국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은 총 9,148건에 달했다. 이 중 절도 및 빈집털이가 3,758건, 기물 파손·반달리즘·방화가 3,237건, 그리고 폭력 사건이 1,974건이었다. 45개 경찰청 중 33곳만이 응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 자명하다.

한 지인은 이 데이터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대부분이 지붕의 납자재를 훔쳐가는 절도이거나, 소도시에서 흔히 일어나는 철부지들의 파손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종교적 박해의 서사가 아니라 특정 지형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범죄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필자 역시 그의 데이터 분석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단순히 범죄 통계로만 치부하고 넘길 수 없었다.

프랑스 역시 몇 년 전 비슷한 파고를 겪었다. 프랑스 내무부는 2018년 한 해 동안 1,063건의 반기독교적 행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하루 평균 두 건꼴로 교회가 공격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추세는 지금까지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유럽 내 기독교인에 대한 불관용 및 차별 감시 기구(OIDAC)'는 2021년 519건이었던 증오 범죄가 2023년 2,444건으로 급증했음을 추적해냈다.

조사에 따르면 가해자의 면면은 이슬람 극단주의자, 극우, 극좌, 사탄주의자 등 다양했으며, 당국이 '부적응자나 미성년자'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즉, 단일한 의도나 거대한 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열려 있고 경비가 허술하며 낡고 비어 있는 건물을 노린 '기회주의적 공격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잠시 멈춰 서서 고민해보고자 한다. 양측의 반응 모두가 더 흥미로운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박해'가 아니다
한쪽에서는 이 모든 수치를 서구 기독교 박해의 증거로 삼으려 한다. 수치와 고통, 패턴이 실재하니 곧 박해라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결론이다. 고철로 팔기 위해 교회 지붕의 납을 훔치는 행위는 종교적 박해가 아니라 기회 타깃을 노린 절도다. 10대 청소년이 교회 문에 사탄의 오각형 별을 그리는 것도 조직적인 반기독교 캠페인이 아니라, 그저 철없는 행동인 경우가 많다.

이런 개별 사건들을 '박해'라는 카테고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은 오히려 박해를 주장하는 논거의 진정성을 해칠 뿐이다. 프랑스의 데이터 역시 마찬가지다. 성물이나 성모상, 감실을 훼손하는 진정한 증오 범죄는 엄중히 다뤄야 하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좀도둑질이나 술 취한 반달리즘, 부적응자의 기행일 뿐이다. 모든 범죄에 '박해'라는 라벨을 남발하면, 정작 그 단어가 지녀야 할 무게감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는 종교 기관에 대한 '경시'를 드러낸다
만약 이것이 박해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이 훨씬 더 광범위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낸다고 본다.

필자는 오랫동안 '종교 자유 침해인가 아니인가'라는 이분법적 접근에 불편함을 느껴왔다. 연구 방법론상 '예' 혹은 '아니오'로 구분해야 할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현실의 복잡함이 깔끔한 카테고리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이 소실되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대개 신자들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들은 건물을 겨냥한다. 그 건물이 하필 교회인 이유는 교회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감시자가 없고, 낮 동안 열려 있으며, 돈이 되는 금속이 많고, 부수기 딱 좋은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방문객에게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목적 원칙을 고수하는데, 이러한 '개방성'이 그 의미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거대한 음모는 없다. 하지만 이 패턴 자체가 말해주는 바가 있다. 서구 유럽에서 교회가 이제는 '공격해도 괜찮은', 혹은 '공격하기 쉬운' 사회적 위치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나이지리아나 파키스탄처럼 공격 그 자체가 목적인 강렬한 적대감과는 다르다. 그보다 훨씬 완만하고 은근한 형태의 수용, 즉 교회를 '가치가 낮은 범죄 대상'으로 등록하는 분위기다. 유대당이나 모스크가 훼손되면 국가적 뉴스가 되지만, 교회의 납이 뜯기고 감실이 뒤집히는 사건은 지역 신문의 한 줄 기사조차 되기 힘들다.

이러한 '공적 분노의 위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공적인 상상력 속에서 여전히 '도덕적 보호 구역'으로 인정받는 종교 기관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척도다. 여기서 서구 유럽 삶 속에서 기독교의 도덕적 입지 하락이 드러난다. 교회에 대한 반달리즘은 이제 '용납할 수 없는 일'에서 '그리 심각하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다.

범죄자들은 영리하게 비용 대비 편익을 계산한다. 그들은 교회를 훼손했을 때 치러야 할 사회적·법적 비용이 다른 문화 시설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것은 박해라기보다는, 서구 사회가 한때 교회에 부여했던 '특별한 지위'가 서서히 침식되고 있는 과정이다. 이 침식은 체포나 유죄 판결 수가 아니라, 이웃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교회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동에서 측정된다.

이러한 변화는 예배 중에도 나타난다. 관광객들이 미사 도중 당당히 걸어 들어와 떠들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나간다. 그들에게 악의는 없다. 단지 그 장소를 더 이상 '성소(聖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잊어버린 것뿐이다.

필자는 종교 자유의 틀이 바로 이런 지점을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건을 '박해인가 아닌가'로 판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종교 공동체의 위상과 국가로부터 받는 보호의 수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질문해야 한다.

교회가 광범위하게 훼손됨에도 공적 분노가 미미하고 수사가 소홀한 사회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회가 아니다. 기독교가 누리던 '공적 보호막'을 상실한 사회일 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과장 없이 직시되어야 한다.

영국의 9,000건의 범죄는 박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룩한 공간이 일반 대중의 눈에 어떻게 그 거룩함을 잃어가는지, 그 느리고도 화려하지 않은 타락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순교하지 않는 그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면에서 박해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며 저강도와 고강도 사이의 무수한 굴곡을 지닌다. 하지만 유럽에서 일어나는 이 현상은 저강도 박해라기보다는 '종교 기관의 사회적 위상 변화'이자 '성소에 대한 공적 상상력의 재코드화'에 가깝다.

이 현상은 실재하며, 설령 '박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더라도 종교 자유의 틀 안에서 정확하게 명명되고 다뤄져야 한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정교하게 구분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