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관심은 권력 아닌 조선 백성들
성경 배포·조선어 수집·현지인 접촉 집중
복음 전파 위한 일관된 내륙선교 실천
예장 합동 제6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를 주제로 11일 용인제일교회에서 개막한 가운데, 유해석 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교수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과 함께 그의 ‘내륙선교관’을 집중 조명했다. 기도회는 오는 13일까지 이어진다.
유해석 교수는 12일 강연에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의 내륙선교관’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며 “토마스 선교사는 단순한 비극적 인물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땅을 향해 나아간 내륙선교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유 교수는 그동안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부는 토마스를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연결해 침략의 동조자로 보거나 충동적 인물로 해석하기도 했다”며 “이는 제한된 사료와 정치·이념적 해석이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말했다.
특히 유 교수는 기존 연구들이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에만 집중해 왔다며, 그의 선교관을 19세기 ‘내륙선교(Inland Mission)’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에 따르면 19세기 중후반 서구 선교는 기존 해안 중심 선교에서 벗어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내륙과 미전도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선교는 개인적 충동이나 우연한 행동이 아니라, 당시 세계 선교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선교적 결단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토마스 선교사의 성장 배경도 소개했다. 웨일스 회중교회 목사였던 부친 아래에서 성장한 그는 칼빈주의 신학 전통 속에서 복음의 절대성과 선교적 소명을 배웠으며, 어린 시절부터 설교와 노방전도에 헌신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토마스는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났고 현지 문화와 언어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 했다”며 “그의 선교 전략은 조계지 중심의 안정적 선교가 아니라 현장 중심의 내륙선교였다”고 말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가 상해에서 기존 선교사였던 윌리엄 무어헤드와 갈등을 겪은 배경 역시 선교관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토마스는 현지 중국인들 속에서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무어헤드는 외국인 중심 사역과 조계지 거점 선교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토마스는 ‘중국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라고 밝힐 정도로 현장 중심 선교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며 “결국 그의 선교 방식은 훗날 런던선교회 안에서도 인정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의 두 차례 조선 방문에 대해서도 상세히 언급했다. 유 교수는 “1865년 첫 조선 방문 당시 토마스는 서해안 지역에서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고 조선어 표현을 수집하며 현지인들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는 단순 방문이 아니라 장기적 선교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가 배포한 성경책이 평양까지 전달됐고, 실제로 조선인들이 ‘야수교 책이 매우 좋다’고 말한 기록도 있다”며 “이미 복음의 씨앗이 조선 내륙으로 들어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통한 두 번째 조선 방문에 대해서는 “토마스는 평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주민들과 만나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다”며 “그의 관심은 권력자보다 일반 백성들에게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특히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 셔먼호의 책임자였다는 기존 인식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토마스는 조선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었기에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인물로 보였지만, 실제 선박의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었다”며 “오히려 그는 조선의 정치 상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또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군함 프린세스 로얄호와 동일한 배라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미국 공식 문서와 선박 기록을 검토한 결과 두 선박은 규모와 연혁 자체가 다르다”며 “제너럴 셔먼호는 원래부터 무장 상선 형태로 운용된 선박이었다”고 말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일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존에는 『고종실록』 기록을 따라 9월 5일로 알려졌지만, 평안감사 박규수의 장계 전달 시차를 고려하면 실제 순교 시점은 9월 2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강연 말미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복음이 닿지 않은 땅을 향해 내륙선교를 실천했던 선교사였다”며 “그의 순교는 실패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교회 복음화의 역사적 출발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토마스를 단순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 속 인물로만 규정하는 것은 그의 선교사적 정체성을 축소하는 것”이라며 “한국교회는 그를 19세기 세계 선교 흐름 속에서 내륙선교를 실천한 선구적 선교사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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