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는 함정을 피하는 법"(Avoiding the 'not a real Christian' trap)을 8월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그동안 크리스천포스트(CP)에 ‘구원의 영원한 보장(eternal security)’에 관한 글을 여러 편 기고해 왔으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데 조금도 주저한 적이 없다.

필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 부르든, ‘성도의 보존’이라 부르든, 좀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once saved, always saved)’고 부르든, 이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요약돼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주시고, 그의 영으로 유효하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나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상태에서 끝까지 확실히 인내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확신을 붙들어 왔다. 깊이 연구하고 기도했으며, 글을 쓰고 이 교리를 변호해 왔다. 이 정도라면 누가 필자의 구원에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단 몇 분 만에 흔들린 확신

얼마 전 필자는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고린도전서 13장, 이른바 ‘사랑장’에 관한 설교를 듣고 있었다.

설교자는 바울이 묘사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차근차근 설명하다가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여러분의 모습입니까?” 이어 그는 물었다 “여러분은 항상 주변 사람들을 사랑합니까? 완벽하게 인내합니까? 결코 화내지 않습니까?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모든 고난을 기쁨으로 견딥니까?”

그리고 결국 이런 뉘앙스의 질문으로 나아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필자는 그 자리에 서서 바울이 말한 사랑의 기준에 자신이 얼마나 턱없이 부족한지를 절감했다.

그러자 아주 짧은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저 설교자의 말이 맞는다면 어떻게 하지?’ 놀라운 일이었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수년 동안 연구하고, 수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글을 쓰며 변호해 왔음에도, 누군가 필자의 영적 상태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을 던진 지 불과 몇 분 만에 마음이 흔들렸다.

독자도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의 말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설교를 듣거나 대화를 나눈 뒤, 자신의 구원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기치 않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도 좋다.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한 이유

필자가 오랜 시간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영원한 구원의 보장을 믿는 훌륭한 성경 교사들조차 본의 아니게 진실한 신자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성경의 약속을 충실하게 가르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진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특징들을 길게 나열하며 앞서 전한 확신을 사실상 거둬들이기도 한다.

그 결과 마음이 여린 신자들은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그 진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필자가 접한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청교도 매튜 미드(Matthew Mead)의 작은 책 『유사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필자는 이 책을 저자 자신을 포함해 이 땅에 태어난 거의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인의 범주에서 배제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체크리스트라고 설명하고 싶다.

책을 덮은 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진정한 스코틀랜드인 오류(no true Scotsman fallacy)’의 극단적인 형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정하게 말하면, 이 문제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성경이 두 측면 모두를 분명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험하라는 말씀

한편으로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베드로 역시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벧후 1:10)

이러한 경고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가장 두려운 말씀을 우리가 듣지 않도록 경계하게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그러나 이와 동일하게 강조해야 할 또 다른 진리가 있다.

시작하신 일을 끝내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신다는 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자신을 시험하라는 명령과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약속을 동시에 붙드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한쪽 극단은 도덕폐기론(antinomianism)이다. 구원이 보장됐으니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분명히 부정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반대편 극단은 완전주의(perfectionism)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죄 없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이 견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모든 완전주의는 하나님께서 성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변화는 점진적이다. 결코 즉각적이지 않으며, 이생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현실을 인정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 3:12)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두 극단을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을 정직하게 살피면서도, 끝까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확신을 누릴 수 있는가?

완벽함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고전 『신앙감정론(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을 살펴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에 답하려 했다: ‘진정한 회심과 겉모습에 불과한 신앙 고백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책을 시작한다: “인류에게 이보다 더 중요하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바르게 해결해야 할 더 절실한 질문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원한 상급을 누릴 사람들을 구별하는 표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에드워즈의 답변은 놀라울 만큼 균형 잡혀 있다. 거짓 회심자도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며, 거룩함을 향한 진실한 갈망도 없다.

반면 참된 신자 역시 신앙을 고백한다. 그는 여전히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자주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

하나님을 향해 점점 자라나는 사랑과 의로움에 대한 갈망, 죄에서 온전히 해방되기를 바라는 깊은 열망이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신앙은 대부분 거룩한 감정들(holy affections)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는 위대한 신앙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면 그것이 반드시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구원의 증거는 죄 한 점 없는 완벽함이 아니다. 구원의 증거는 여전히 남아 있는 죄와 싸우면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점점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점점 더 미워하게 되는 새로운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

구원의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진리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향하셨을 당시 필자와 독자의 모든 죄는 아직 미래에 속한 일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과거의 죄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는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요한이 사용한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만 말하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했다.

왜 용서가 정의로운 행위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가 받아야 할 형벌을 이미 온전히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이를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형벌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께 쏟으셨다. 죄의 대가가 이미 완전히 지불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는 그 죄를 다시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법정에는 이와 비슷한 ‘일사부재리(double jeopardy)’ 원칙이 있다. 한 범죄에 대한 재판과 형벌이 이미 끝났다면 동일한 범죄로 다시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물론 이 비유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성경적 진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대가를 지불하신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를 다시 정죄하시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이 얼마나 완전한가에 달려 있다.

영원한 구원 보장의 반석

이것이 영원한 구원 보장의 견고한 반석이다. 우리의 확신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만족시키셨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히 10:17)

그러므로 오늘 참된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마음을 놓아도 좋다.

허용된 횟수보다 한 번 더 죄를 짓거나, 어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서 내쫓길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될 수 없다. 당신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이 바로 당신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받아야 할 심판을 모두 감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는 이제 당신을 향해 무기를 겨누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의 구원이 완전하게 보장됐음을 증언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히 4:10)

바로 그곳에서 안식하길 바란다. 자신의 행위나 성과에 기대지 말라. 자신의 일관성에도 의지하지 말라. 누군가 만들어낸 온갖 기준과 시험에 완벽하게 부합하려는 자신의 불완전한 능력 안에서 안식을 찾지 말길 바란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사역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 그리고 진정으로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영원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 안에서 안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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