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의 기고글인 ‘‘존엄사’라는 말은 허상이다. 그러나 존엄하게 죽음을 맞는 일은 존재한다'('Death with dignity' is a farce. But there is dying with dignity.)를 5월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방영된 CBS ‘60분(60 Minutes)’의 한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인터뷰어 스콧 펠리는 출연자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왜 이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작년 12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전 미국 상원의원 벤 새스(Ben Sasse)는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나를 초대했으니, 방송 분량을 채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새스는 이제 겨우 14살인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딸들의 손을 잡고 결혼식 행진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지금 온 미국에 ‘존엄하게 죽어가는 것(dying with dignity)’이 무엇인지에 대해 경이로운 교훈을 전하고 있다. 그는 정치 권력의 유혹과 한계를 경고하며 무엇이 더 본질적인 가치인지 선포한다.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해온 그는 "더 많은 소비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동시에 기술이 가져다줄 혜택에 대해서는 낙관하면서도, 기술이 우리 자아상과 행복감, 특히 청년들의 삶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한다.
그의 모습은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양 대하는 금욕주의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는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실감에 슬퍼하고, 일 때문에 출장을 다니느라 정작 집을 지키지 못했던 시간들을 후회한다. 암이 가져다준 육체적 고통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세상에 아주 특별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제임스 우드 박사는 최근 ‘월드(World)’지 기사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생명을 해치고, 종말을 직시하지 않으려 죽음을 숨기는 문화 속에서, 유명 인사가 대중 매체를 통해 '잘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로 미묘하지만 급진적인 행동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생명의 존엄성과 선물로서의 가치,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지는 삶의 의미를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이 점점 보편화되는 세상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유럽,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여러 주에서 소위 ‘조력 존엄사(MAiD)’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를 ‘존엄한 죽음(death with dignity)’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한다. 하지만 이 용어 이면에는 ‘존엄하게 죽어가는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끝이 올 때까지 고통을 마주하거나 인내하며 삶을 예우하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이 마치 용기 있고 자비로운 선택인 것처럼 말하곤 한다.
신도 없고 희망도 없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틀 안에서 삶은 셰익스피어가 맥베스의 입을 빌려 말했듯, "아무런 의미도 없이 소음과 분노만 가득한 채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더 높은 목적이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면 왜 이토록 무의미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 할까? 이들에게 죽음은 그런 삶으로부터의 탈출일 뿐이다. 즐거움이나 풍요로움이 사라지는 순간, 죽어가는 방식에서 존엄성을 찾기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중심을 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존엄성을 회복시켰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썼듯이, 죽음이 변화되었기에 '존엄한 죽음'이 가능해진 것이다. 삶의 종말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마주하는 용기 속에는 분명한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죽음의 고통과 시련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구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삶에서 목격되는 이런 용기는 부정할 수 없는 힘을 가진다.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은 낙태 문제로 마더 테레사 수녀에게 강한 비판을 받은 후, "그토록 훌륭하게 살아온 인생에 대해 논박하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벤 새스가 보여주는 마지막 나날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그토록 '훌륭하게 죽어가는 모습'에 대해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지혜로운 목회자가 관찰했듯, 우리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겠지만,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야말로 그들이 우리 신앙에 대해 기억할 가장 강렬한 장면이 될 것이다. ‘존엄한 죽음(안락사)’은 우리를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비인간화하는 기만적인 발상일 뿐이다. 하지만 벤 새스와 그의 가족을 위해 은혜와 평강을 기도하는 이 순간에도, 새스가 보여주는 ‘존엄하게 죽어가는 과정’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고 계신 깊고 심오한 선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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