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경에서 언급하는 여성의 역할

서창원 목사
서창원 목사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에 비추어보면 교회의 덕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할 때 성립된다. ‘은혜나 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의 위안을 위해서 역사하는 예외적인 은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려는 편리적인 발상을 교회가 한다면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신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교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여권신장운동은 여성의 권익 찾기와 보호를 가장한 세속주의 운동이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의 교훈과는 다른 것이다. 개혁교회는 단 한 번도 여성 차별한다든지 여성을 억압하는 비난을 받는 가르침을 한 적이 없다. 여성 편력증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든지 다 하나임을 굳게 믿는다. 우월적인 존재도 열등한 존재도 없다. 다만 교회를 섬기려고 주신 은사가 다를 뿐이다. 즉 역할이 다른 것이다. 갈라디아서 3:28 말씀은 남녀동등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평등권, 종족이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성은 창조의 정상이며 끝이며 완성이다. 그래서 사단이 여성을 먼저 시험한 것이다. 바울이 여성 혐오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존재하지만, 그는 고린도전서 11:7에서 여성을 남성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성이 남성을 드러내고 여성이 남성의 참모습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여자 없이 남자가 존재할 수 없고 남자 없이 여자도 존재할 수 없듯이 여성이 없는 교회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남성보다 더 우월적인 물질에서 창조된 여성도(남자는 생명이 없는 흙에서, 여자는 이미 살아 있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남녀가 평등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성령께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각각의 몸에 둔 은사는 남녀 동등하게 허락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녀 성도가 다 교회의 구성원이기에 차별이 없다. 남성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교회 회원이 되고 여성도 똑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되는 것이다.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하면서 어떤 은사는 직분자로 세워지는 호칭이 있지만, 나머지는 직분 혹은 호칭이 없이 단지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지체로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교회의 일군으로 호칭이 주어진 것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및 교사’라는 에베소서 4:11 말씀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권한을 행사하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많이 있지만, 필자는 성경 계시와 관련된 초자연적 은사의 종결성을 믿는다. 특히 ‘목사와 교사’라는 칭호는 디모데전서 5:17을 근거해서 보면 ‘치리 장로’(ruling elder)와 ‘강도 장로’(teaching elder)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같은 장로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벧전 5:1). 그리고 목회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감독(장로)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다(딤전 3장, 딛 1장). 그 외에 신약성경 어디에도 교회 직분을 가진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의 항존직에 장로와 집사로만 규정하고 있다.

교회에 주신 은사를 언급한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에 보면 호칭이 아니라 기능을 강조하는 은사를 언급한다. 사도와 선지자 및 교사를 제외하고는 ‘능력이요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 12:28). 그리고 로마서에서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 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직분을 받음이 없이도 받은 은사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섬기는 자들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 중에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아니라고 배제된 것이 있는가? 성령께서 거듭난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교회 안에서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이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섬김의 자세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가르치는 일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인이 감당했다(행 18:26). 그것도 성경에 능한 아볼로를 개인적으로 사사할 정도였다. 다스리는 일도 겐그레아 교회 자매 뵈뵈가 감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녀를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했는데(롬 16:1) 보호자에 해당하는 헬라어(προστάτις)가 일반적으로 남성형으로 쓰이는 단어로써 어떤 공동체의 합법적인 우두머리나 대변인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러나 본문에 쓰인 단어는 여성형 명사이다. 위급할 때나 어려울 때 도와주는 후견인이나 구원자 혹은 조력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일에 다스림의 영역은 배제되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는 여성이 직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직분의 직임 여러 부분을 수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교회가 여성 사역자들에게 가르치는 일(교사나 구역장)과 다스리는 일(전도회장, 구역장, 위원회 활동 등)을 포함하여 구제와 섬김의 일, 권위 하는 일,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들을 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라고 본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에서 여성은 교회의 직분자로 세움을 받음이 없이 성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세워감에 적극적으로 종사해 왔다. 이는 교회의 직분이 계급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목사나 장로, 혹은 집사가 교회에서 가지는 계급으로 여겨졌다면 이는 분명 우열을 나누는 차별을 말할 수 있다. 직급이 다르기에 직급에 따라 대우도 달라야 한다는 논리는 한국의 교회에서 계급으로 인식하고 있는 잘못된 통념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적 관습에 맞게 직책을 주어서 은사에 따라 섬김을 감당하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직책도 비록 임시직이라 하더라도 처음 출발은 바르다고 하더라도 남발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지금 서리 집사처럼). 따라서 직책을 창의적으로 만들어서 직분자를 세우자는 것은 반대한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장로와 집사직에 한하는 것이 옳다.

‘교회 정치는 세속의 정치와는 달리 잘 다스리기 보다 잘 인도하는 것이라야 한다.’ 주님의 진리 가운데로 잘 인도해야 한다. 푸른 초장으로, 시원한 물가로 인도해야 한다. 목사는 주의 기록된 말씀으로 양을 먹이고 돌보고 살피는 일을 하며 성도들은 선포되는 말씀으로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아서 자신이 받은 은사의 활용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워가는 것이다. 여성도 복음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복음을 전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성도라면 모두가 다 전도자여야 한다.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직접 메시아를 증언하였다(요 4:39). 부활의 첫 소식도 사실 여성이 전하였다(눅 24:9-10).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쟈크 엘룰은 이 여성들을 “계시의 전도자들”로 묘사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영생에 대한 최초의 증거를 받은 이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이브라는 이름의 완성이요 뱀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면서 창조의 최고 절정인 여성으로부터 이제 계시의 완성이 그들의 입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주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알려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여성들에게도 제자들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았고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른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였다(행 2:4, 11). 구제 사역에 앞장섰던 욥바의 다비다(행 9:36-43), 그리고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 음식 접대와 숙박 제공의 일을 한 유럽에서 최초의 크리스천 여성이자 빌립보 교회의 태동이 된 루디아(행 16장, 빌 4:15), 신약성경에 6번이나 등장하는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주기까지(롬 16:4) 헌신한 교회 개척자들이요 성경에 능한 아볼로에게 신학적 교훈을 지도해 줄만큼의 탁월한 능력이 있는 여성이었다. 자유주의 학자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하르낙은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의 도움을 힘입어서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만큼 브리스길라의 공헌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빼놓고 설명이 안 되는 부분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지위로도 로마 귀족 출신인 브리스길라를 고린도 교회에서도 에베소 교회에서도 심지어 로마교회에서까지도 바울이 장로로 혹은 집사로 안수해서 교회 직분자로 세운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교회가 그 부부에게 감사할 정도로 탁월한 존재였다. 그런데도 직분을 받음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음껏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긴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의 말씀이나 디모데전서 2:12절 말씀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아서 잘못된 것이라거나 시대의 문화적 산물로 여긴 것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가 아니라 교회의 일군들로 섬기는 일, 구제하는 일, 전도하는 일, 가르치는 일, 봉사하는 일들에 여성들에게 다 허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가는 글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저명한 교수들과 목사들이 발표한 논문이나 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찬성 쪽이든 반대편이든 자신들의 논리가 우월하다는 인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만고불변의 진리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이 뭐라고 하느냐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성경이 말하는 것과 지난 기독교 역사 2천 년이 금지해 온 이유는 여성안수 허용을 촉구하고 있는 자들의 시대변화를 반영하자는 것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안수는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호소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하나님의 뜻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교회를 섬기도록 부르시고 감당할 은사를 부여하시는 성령의 뜻이 시대의 조류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함부로 여성안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성 안수를 허용하고 안 하고의 결정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 교회는 노회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총회가 설립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 외에는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할 중보자가 없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도 유일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교회에서 법령을 규정하고 반포하고 실행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따라서 그가 제정한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여호와 섬긴다고 최선을 다했어도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판단은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가지 않는다.

교회법 역시 성경에 위반되어서 제정될 수 없다. 성경에 위배 된 결정은 사도들이 공회 석상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무엇이 더 옳은가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행 4:19-20)라는 말씀이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라고 선언한 것은 지금도 진리이다. 필자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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