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물줄기는 사람의 생각이나 예측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콘스탄틴의 장자가 루머에 의해 자살형을 받고 세상을 떠났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들은 시어머니 헬레나 여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 며느리 파우스타의 세 아들에게 돌아갔다. 세 아들은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통치. 콘스탄티우스 2세-트라키아, 아시아(아나톨리아), 이집트, 시리아 등, 제국의 부유한 동부 지역, 셋째 콘스탄스-이탈리아, 아프리카, 일리리쿰(발칸반도)를 통치하도록 했다.
이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삼촌과 사촌들을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런 잔인함은 백성들의 신망을 잃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탐욕에 눈이 어두운 권력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이들은 전 로마를 셋으로 나누어 통치를 시작하였지만, 서로가 상대방의 영역을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 탐욕의 칼을 먼저 뽑은 자는 장남 콘스탄티우스 2세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자신이 장남이니 마땅히 수도 로마제국을 품은 이탈리아를 통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은 넓은 영토인 갈리아(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히스파니아(스페인과 폴투갈), 브리타니아를 통치하고 있었고, 갈리아나 게르마니아는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340년 막내가 통치하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로마는 천년 가까운 수도로서의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베니스 북쪽) 근처에서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말았다. 고로, 막내 콘스탄스는 형이 통치하던 막강한 영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셋 중에 한 사람이 사라짐으로 두 형제가 남았다. 그는 맏형의 침공을 막아내고 서방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으나 가혹한 통치와 군내 내의 민심 이반으로 인기가 없었다. 결국 350년, 부하 장군,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방의 통치권은 장군 마그넨티우스에게로 넘어갔다.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nus,Ⅱ.337-361)는 대규모 내전을 일으켰다. 그 결과 마그텐티우스를 격파하고(353) 장남과 막내가 남긴 모든 영토를 통합했다. 비로소 아버지 콘스탄틴 대제가 이루었던 통일 제국을 재차 이루게 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끊임없는 내우외환 속에서 제국을 지켜 냈고 기독교를 국가의 중심에 뿌리내린 황제였다. 형제들의 사망 이후, 군사 종교, 행정 등 후대 로마제국(동로마제국)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변화를 도모했다.
-군사적 업적
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할 만큼 군사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동방의 페르시아의 샤프르 2세는 로마의 동방 국경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그래서 여러분 요새를 잃기도 하였으나 니시비스등, 중요한 거점을 성공적으로 사수하였고 페르시아의 대규모 침공을 저지하는 방어 전략을 고수하였다.
-게르만 부족 격퇴
북방에서는 알라마니족, 콰디족, 사르마티아족 등의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공을 막아내며 국경을 안정화했다.
-군제개혁
페르시아와 이민족을 대항하기 위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을 두 배로 확충했고 기병대를 강화했다.
-종교정책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유감스럽게도 아리우스파를 지원했다. 황실 주변에 아리우스를 좇는 무리들이 가득했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리우스파를 지원함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로 그를 여러 번이나 추방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교 제사를 금지하고 사원들을 폐쇄 및 이교도를 따르는 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행정
아버지가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서 완전히 정착시켰다. 당대의 역사가 마르첼리누스는 그에 대해, 인척들을 숙청하고 잔인한 면이 있으나 종교 분쟁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국력을 낭비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대 학계는 그를 반란 군의 휘협 속에서 제국의 행정 구조를 유지하고 국경을 지켜 낸 유능하고 성실한 관료형 황제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혼자서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가 벅차다고 여겨 사촌 동생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갈리아 지역을 맡겼다. 그는 콘스탄틴 대제가 죽은 후 권력 투쟁에서 아버지와 친형들, 가문이 모두 학살당하는 와중에 6세로,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자였다. 철저한 감시 속에서 자랐고,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매료된 자였다.
그런데 그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군대의 절대적 지지를 얻게 되자 둘 사이는 내전의 긴장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서방으로 가던 중 열병으로 급사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는데, 후계자가 되자 본색을 드러냈고, 배교자가 되었다. 로마의 옛 다신교를 부활하려고 시도했고, 은근히 기독교를 핍박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를 정벌하러 갔다가 날아온 창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이었고, 재위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자신의 피를 손에 쥐어 하늘에 뿌리며, 갈릴리인이여, 그대가 이겼도다(Vicisti, galilaee)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기독교의 거대한 물줄기를 막아보려 했으나 실패했 다. 그는 배교자이었으나 뛰어난 군사령관이자 철학자요, 부패한 관료제를 개혁하려고 했던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는 자다. 이로써 콘스탄틴 가문은 겨우 2대 만에 종언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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