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경적 근거와 대안

서창원 목사
서창원 목사

여성 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적 오류는 첫째 교회가 세상과 다른 존재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률(jure divino)로 다스려진다. 반면에 세상은 국법으로 통치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임이다. 이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영적 가치와 기준이 교회 제도와 근간이다. 국법은 통치권자의 의지와 국민의 열망에 의한 민주적 결정으로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은 교인의 총의(總意)로 혹은 교단의 총회에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법과 신률이 충돌될 때 교회는 성경의 우선권에 따른다. 교회 제도 변경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둘째는 성경은 시대적 문화의 흐름과 사상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시대를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도 없으시기에 구약에서 약속한 것을 신약에서는 완전히 뒤바뀌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안식일과 구원의 완성을 기념하는 주의 날 차이에서 이해하지만, 안식일 준수의 원리는 주일 성수의 원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교회는 구약과 신약에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은 맞아도 신약시대에 와서 비로소 출범한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의 규정이 신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 제도도 지금의 시대하고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배척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수정안을 삽입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시대, 모든 족속에게 적용하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을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이다. 이것은 곧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아니하는 증거가 된다. 인간 누구도 성경을 기록할 주도권이나 마무리할 결정권도 없다. 기록된 말씀 밖을 넘어갈 수 없다(고전 4:6).

특히 여성안수를 불허해야 한다는 전통적 입장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근거 구절로 즐겨 사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에 대해 최영숙 교수는 자기 논문에서 여성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14:28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잠잠하라’(σιγάτωσαν)는 것과 30절에 계시를 말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계시를 말하게 되면 먼저 하던 자가 ‘잠잠하라’는 말씀, 그리고 34절에서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처럼 잠잠해야 할 대상이 각각 세 부류이다. 즉 방언을 말하는 남성과 여성, 예언하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여성이다. 그런데 앞의 두 부류가 교회에서 침묵해야 할 상황이 분명하나 34절은 어떤 상황에서 잠잠해야 할지 말하고 있지 않다. 34절의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면 여성이 교회에서(공적 모임에서) 잠잠해야 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최영숙은 이것은 ‘바울이 방언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교회의 지침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이 방언이나 예언을 할 때 교회의 지침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최영숙은 여성이 방언 특히 예언(설교로 이해하고 있음)을 거부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교회의 세움을 위한 긍정적인 참여’를 권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분명한 것은 문화적 명령에 의한 권면이 아니고 바울의 주관적 여성 편력에 의한 지침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서 후세에 어떤 필사자에 의해서 첨가된 것이 아닌 바울의 서신 원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여성도 얼마든지 교회의 지도력의 권위 아래에서 기도나 예언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런 맥락에서 35절의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는 말씀도 여자가 교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 기도나 예언 자체를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할 때 고린도 교회 여성 ‘모두’가 무질서하게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한 것이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질서대로, 남성 지도력의 권위 아래에서 성령의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방언도 예언도 한 여성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본문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도”’라고 하지 않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디모데전서 2:12과 연계시켜서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도”라고 했으면 여성 사역자의 은사 활용이 교회 안에서 질서 있게 실천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이라고 한 것은 헬라어 αί γυναίκες는 영어로 the women, 즉 그 여성들로 번역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을 서슴없이 사용한 그 여인들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35절의 ‘여자’는 γυναικί로 단수로서 영어의 a woman, 여자이다. 그런데 헬라어 용법상 뒤에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와 짝을 이루어 ‘구나이키’를 여자가 아닌 ‘아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보편적으로 남편을 둔 아내는 남편에게 물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한편 고린도전서 14:34-35은 교회에서 기도와 예언을 허용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1:5과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현우 교수의 관찰은 서로 모순이 없기에 14장의 본문은 필사자의 삽입으로는 본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14장은 ‘기도나 예언을 금하는 구절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인(부인)들이 (성경 강론 시간에, 또는 방언이나 예언 시간에) 질문하는 것을 금하는 것임이 35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용한 헬라어 λαλείν(말하다)는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도 있겠으나 35절에서 여성들이 질문할 것이 있으면 그들의 남편에게 ‘물을찌니’(έπερωτάτωσαν)라는 것을 보면 34절의 ‘저희의 말하는 것’은 방언이든 예언이든 질문할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다.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의 지도력에 들어가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 성경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일을 금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디모데전서 2:12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διδάσκειν δέ γυναικί)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라”는 말씀과 일관성이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가르치는 일은 그다음 3:2에서 장로(감독)의 자격 중 ‘가르치기를 잘하며’(διδακτικόν)라는 자격 규정으로 설명한다면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 직분(직책)을 맡음이 없는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셋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총회에서 목사를 안수받을 때 서약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교단을 탈퇴하거나 안수 때에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교단 내에서 버젓이 목회하면서 교단 내 중요한 직책까지 맡아서 서약한 내용과정반대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의 근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짓이다. 이는 반드시 교단적 차원에서 성경과 교회법을 위반한 권징의 대상이 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교단의 신학적 기조 자체가 오류라고 확신한다면 목사 임직을 받을 때 한 서약을 깨고 교단에 사직서를 내는 것이 옳다. 그리고 허용하고 있는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사실 공격받을 구멍은 있다. 교단의 헌법적 가치와 교리적 교훈, 및 예배 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승낙한다고 서약만 했지, 실질적으로 지교회에서 행하는 가르침과 예배 및 기타 여러 일에 있어서 서약한 내용을 파기하는 일들은 여러 방면에서 벌어지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 어떤 제재도 하지 않으면서 왜 여성안수만 성경적이지 않다고 문제로 삼느냐는 항의에 솔직히 얼굴만 화끈거린다. 솔직히 말해서 사문화된 것과 다름이 없는 목사 안수식과 교회 임직식에서 서약하는 부분은 앞에서 지적한 K교수의 주장처럼 수정하든지 아니면 변경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적이기에 반드시 지키도록 강화하여 개혁교회의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여성안수를 금하고 있다는 것이 교단의 자랑이 아니라 임직식에서 서약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또한 여성이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는 경우도 이는 명백한 현대교회의 잘못이다. 나는 이것이 당대 고린도 지역의 문화였기 때문에 현대 문화에 맞지 않아서 강조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 본 적이 없다. 과거에는 절대다수가 다 결혼하였다. 그래서 남편의 권위 아래에 있는 여성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세속주의 영향을 받아 현대교회가 하지 않을 뿐이지 당대의 문화적 요소였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지금도 머리에 두건을 쓰게 한다. 그런 면은 천주교가 더 성경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이 머리에 두건(모자)을 쓰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영국의 개혁교회 여성도들은 지금도 주일 예배 시간에 모자를 쓰고 나온다.

마지막으로 여성 안수 허용론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단 한 가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대답해 준다면 나도 여성에게 안수의 문을 열어주자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디도서 1:6절 말씀에 등장하는 감독 혹은 장로의 자격이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μιᾶς γυναικὸς ἄνδρα)라고 규정한 것을 누가 무슨 권위로 ‘한 남편의 아내여야 하며’라고 변경할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여성 안수 허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글을 접할 때 단 한 사람도 이 구절을 언급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성경에는 이 구절이없는가 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고자 인용한 성경 구절들에 대한 재해석 및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일들, 단지 교회 지도자로 활약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서 여성 안수 허용을 앞세우지만 왜 안 되는지 자격 규정에 대한 바울의 목회서신에서의 지적은 함구하고 있다.

안수하여 교회 일군으로(office bearer) 세운다는 것은 남녀 성별 차별이나 은사의 보편성이나 요엘서에 있는 남녀 종들과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에 대한 것을 앞세워 여성에게도 안수해서 교회의 일군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별개의 문제이다. 솔직히 성경 해석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교회 직분자를 설명하는 문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수 허용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말씀도 아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유대인의 국수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범우주적 기독교임을 확증하는 것과 구원의 적용과 확신에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왔다가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한 모든 사람, 베드로의 한 번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은 3천여 명의 사람이 다 목사나 장로가 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은총은 국적과 피부색을 초월하여 온 땅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임을 확증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는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는 탁월한 여성 그리스도인이었을지라도 안수하여 교회 일군으로 세웠다든지 사도들에 의해서 특별히 사도나 선지자나 장로나 집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20세기에 벌어진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여서 인간에게 인권과 평등사상 및 성인지나 여성 해방 차원의 세속적 가치관으로 성경 해석과 적용을 얼마든지 수정 보완할 수 있다고 허락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뜻은 일정하시어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위한 일군을 세우심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여성의 자질과 능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왕성한 활동을 억압하시고 있는가? 그래서 시대 조류에 발맞춰가고 선도하는 선각자들의 열렬한 활동으로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는 그 억압을 풀어줌이 여성에게도 목사 안수를 허용하자는 이유인가?

진짜 자유는 참 진리를 아는 것이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목양의 무거운 짐을 연약한 그릇에게(벧전 3:7) 얹혀줌이 여성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여성이지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주님의 명령은 교회의 직분자로 세움을 입은 감독 혹은 장로에게 주어진 직무이다.

그런데도 여성 사역자 위원회가 2019년 5월 목장 기도회 때 “목사 340명, 장로 228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질문서에서, “목사 92.9%와 장로 92.85%가 ‘여성 군목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여성 강도권 부여에 대해서도 “목사 82.6%와 장로 82.34%가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성경에 없는 것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큰 죄악이다. 찬성한 분들의 성경관과 교회론에 심각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에서는 들을 귀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이다.

한편 여성안수를 주지 않음으로 자질이 뛰어난 여성 일군들을 빼앗긴다는 것과 교회 성장을 위축시킨다는 논리는 타당한가? 1995년부터 여성 안수를 허락한 통합측 교단이 합동측 교단보다 교회 수가 더 많고 성도 수도 더 많은가? 서로가 장자 교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 수나 교인 수를 비교해보아도 1995년 이후로 통합측이 합동측을 능가하였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여 군목이 없어서 군 선교에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 군목을 배출하고 있는 감리교나 통합측과 같은 교단이 군 선교에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지엽적인 측면에서 분명 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인 것이다(시 25:10). 주님의 인자하심과 진리를 맛보는 길을 택하는 것이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갈 길이다.

나는 이참에 여성 사역자들, 특히 군 선교와 관련하여 교단적 차원에서 해결할 방안을 하나 제시한다. 현재 해외 여러 선교지에서 여성 선교사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목사 안수 없어도 아이들이나 젊은이들, 혹은 여성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들에 사명감으로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과 교단의 헌법적 가치를 소중히 지켜가며 군 선교에도 일정한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군 선교사>로서 여성 사역자를 파송하는 것이다. 그들도 군목들이 가는 과정을 거쳐서 임관하는 길을 열어주되 교단적으로 목사가 아닌 ‘군 선교사’로서 군인들을 돌아보는 군목(軍牧)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자. 군 선교사라는 직책으로 타교단의 군목들과 얼마든지 협력하며 군 선교에 이바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결코 여성을 억압하거나 차별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합동측 교회 안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억압과 차별(대우와 지위 면에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몇 가지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

첫째 교회에서 여 교역자에 대한 처우개선이다. 여 교역자를 남 교역자와 대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학교에서 대체로 남자 신학생들보다 여학생들이 공부를 잘한다. 그런데 졸업 후에는 자기보다 실력이 뒤처졌던 남성 사역자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그 밑에서 조력하는 정도의 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여성 사역자에게는 불만이 가득 쌓여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의롭지도 못한 그러한 불공평한 차별을 없애고 교역자로서의 동등한 대우(사례비 포함), 그리고 동등한 권위를 지닌 일군으로 세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훈련이 없는 여성도 중 사회적 신분이나 경력을 가지고 교회의 여성들을 인도하는 일군으로 세우는 현상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보다는 신학훈련을 전문으로 받은 여 교역자를 충분히 활용하여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는 일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함이 효율적일 수 있다.

안수 행위와 남성 사역자가 하는 업무 상당한 양을 여성에게 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역할 문제가 아니라 직분 문제는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것에 한정되고 더욱이 안수 행위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임하는 도구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를 세우는 방식의 일환이었다면 성경에서 사도들과 늘 동행했던 여인들, 그들이 누구든 안수하여 세운 증거는 없지만, 남성 사역자가 하는 업무와 중복되는 일들을 감당했다. 이 부분은 성경에서 말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다룰 때 언급할 것이다.

둘째, 목회 비서 역이나 교회 심방 사역에 남성 사역자들의 수행원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와 권위를 지닌 동역자라는 인식을 교역자들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새길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대상이라거나 목회 전반에 걸쳐 어떤 의견도 개진할 수 없는 침묵 수행원이 아니라 교회의 당당한 일군이라는 자의식과 공동체 인식 개진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상당수의 여성 사역자들이 학교 졸업 후에 영적인 것만 아니라 지성적인 측면에서 자기 수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여성 사역자를 열등한 위치에 서게 하는 일을 방지하고 그들에게도 남성 사역자들 못지않게 필요한 신학훈련과 영적 자질을 고취해 나가도록 교회가 충분히 배려해 줌이 필요하다.

셋째, 신학대학원에서 여학생들을 선발할 때 목사 안수를 받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이 타교단으로 이적을 방지하는 대책은 아니지만 성경적이지도 않고 교단의 헌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여성안수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방지하는 방안은 될 수 있다. 그리고 첫째 제안에 이어 동시에 학교를 졸업한 여성 중 교회 사역에 전념하는 사역자에게는 전임사역자로서의(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원) 법적 지위를 보장해 줘야 한다. 이를 위하여 최소한의 총회 고시부에서 실시하는 강도사 고시에 준하는 자격시험을 거치게 하고 이에 합격한 자만이 전임사역자로 임명되도록 하자. 이는 양질의 학습을 거치지 않고도 지방신학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졸업한 여성들도 여전도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 구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역하는 동안 교역자로서의 신분을 보장해 주고 은퇴 이후에도 연금이나 퇴직금을 통해서 노후를 염려하는 일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여성 사역자에게는 임직식이 없어서 교단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심지어 여성직분자(예, 권사취임)에게까지 요구하는 정치 15장 10조에 서약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총신에서 수학했어도 교단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수하며 계승해나갈 의무가 없다. 타 교단으로 이적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제재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나 교단이 인준하는 신학교를 졸업한 여성 사역자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임직식 서약을 하게 함으로 훗날 신학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에 합당한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 남성 사역자와 비교하면 교단을 넘나드는 일이 매우 자유스러운 여성 사역자는 신학적 규례에 매이는 것도 없고 목회 윤리적 책임으로부터도 자유인으로 살기 쉽다. 무조건 여성 사역자의 지위와 신분 보장 및 처우개선을 마련하기보다는 그에 맞는 자격을 갖추는 객관적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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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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