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배안호 선교사.
배안호 선교사.

들어가는 말(서론)’: 거대한 산, 다산을 만나다’ → “다산은 어떻게 책을 읽었을까?”
“수원 화성은 어떻게 지었을까요?” “거중기는 화성을 건설하는데 어떤 도움되었나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집대성자/개혁사상가다. 조선의 10대 위인을 넘어 세계적인 인물이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 해인 2012년에 루소, 드뷔시, 헤르만 헤세와 함께 다산을 ‘UNESCO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였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500여권의 독특한 창작물! 다산은 문학, 철학,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의학, 과학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다산은 두보를 능가하는 뛰어난 시인/역사학자/토목공학자/기계공학자/국어학자/의학자였다. “다산에게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을까요?”

<21세기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다산의 독서전략>(권영식, 글라이더, 2012, 292페이지)

“저는 이 책에서 다산의 삼박자 독서법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는 글로벌 인재는 단순히 지식 습득만을 위해 독서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찾아 연구하며,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기존의 지식을 연계시켜 새로운 지적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다산이 활용했던 정독, 질서, 초서 이 삼박자 독서법을 지속적으로 활용한다면 누구든지 글로벌 인재의 조건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p. 5, 저자의 프롤로그, 도대체 ‘삼박자 독서법’이 무엇일까?)

책 「다산의 독서 전략」 앞 표지 이미지
책 「다산의 독서 전략」 앞 표지 이미지.

권영식은 12년간 충북 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과정운영과 독서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책읽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게 되었다. 육아 휴직 중에 이 책을 저술한 저자의 열혈독서 열정이 참으로 예쁘다. 2010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근무하면서 현대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서, <가슴마다 한 권의 책을 심어라>.

전체 5부 목차; 1부: 다산의 생애와 다산의 책읽기/2부: ‘정독’ 발견을 위한 깊고 세밀한 책읽기/3부: ‘질서’ 전문성을 높이는 전략적 책읽기/4부: ’초서’ 글로벌 인재의 창조적 책읽기/5부: 참 지식인을 위한 독서전략.

서평자는 다산의 생애와 책읽기: ‘자신을 지키는 독서’/’만남을 즐기는 독서’/’세상을 살리는 독서’와 다산의 ‘정독/질서/초서’(3박자) 독서법을 집중하며 서평 할 것이다.

1. 다산의 생애와 다산의 책 읽기: ‘다산은 어떻게 전무후무한 통합적 지식인이 되었을까?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조선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요 실학을 집대성한자다. 다산은 한국인으로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방대한 500권 저술을 남긴 위대한 저술가, 대학자. 일평생 책을 읽고 쓰는 일에 집중했다. 관직에 있을 때(18년)나 유배생활 중(18년)일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쉬지 않고 책을 썼다. 오랫동안 책읽기와 저술하느라 복사뼈가 세번이나 내려 앉고 이가 다 빠졌지만 그는 손에서 잠시도 책과 붓을 놓지 않았다.

1.1. 다산은 생애가 궁금해요. 그는 어떻게 성장하였나요?

다산 정약용은 생애는 유년기.수학기/벼슬길.나랏일 시기/유배지(강진)서 저술기. 3 시기로 구분 할 수 있다. 1762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지금의 남양주 시) 정재원(丁載遠)과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의 후손)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다산은 4세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6세때 그의 부친이 연천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틈틈이 경전과 역사를 배웠고 독서와 작문 및 시 쓰기에도 출중한 자질을 보였다. 부친이 호조정랑 벼슬에 있을 때, “서울 남촌에 살면서 누님의 남편인 이승훈(1756-1801), 큰 형의 처남인 이벽(1754-1786), 성호 이익(1681-1763)의 종손(從孫)인 이가환(1742-1801) 등 서학 신봉자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p. 32, 다산은 조선후기 18세기 최고 지식인 집안, 특히 서학(천주교) 신봉자. 지식인들이 일가 친척인 지식인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하였음을 주목하게 된다)

1.2. 다산의 3명의 스승: 아버지(정재원), 성호 이익, 정조임금

다산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부친이 연천 현감으로 있을 때부터 시작. 아들이 7세때 짧은 시(5글자, 2절):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小山蔽大山)/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遠近地不同)”를 본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아들(다산)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

“다산이 나이 열 살 무렵부터 부친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서 아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부친은 다산이 열 살 이전에 지은 시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주고 <삼미집(三尾集)>이라 이름 붙였다. 삼미는 눈썹이 세 개라는 뜻으로 천연두에 걸렸을 때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남아 마치 눈썹이 세 개로 갈려져 보여 친구들이 다산에게 지어준 별명이었다. 천연두랑 싸워서 이긴 훈장이라며 다산은 삼미라는 말을 좋아했다” (p. 78, 다산은 부친에 의해서 7-10세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1.3. 다산과 정조의 만남: ‘바람과 구름의 만남(風雲之會)’(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다산은 22세때, 간신과 총신이 들끓었던 18세기 조선시대 10살 위인 정조(32세)를 만났다. 18년 동안 정조와 인연을 맺었고 정조가 떠난 뒤 다산은 18년 동안 죄인의 몸으로 유배지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다산은 벼슬길에 오르기 전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는 조선의 낡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용적인 지식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이 정조와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을 섭렵한 덕분이었다.

호기심 충만한 다산: ‘어린 나이에서 부터 공부하면서 질문하기를 좋아했다’

“다산은 옛날 경전이나 역사책의 문체를 그대로 모방해 글짓기 연습을 했는데, 영리하고 부지런해서 1년 동안 지은 저서를 쌓아놓고 보니 자신의 키 만큼이나 되는 양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할 때는 책에 씌어 있는 것이라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드시 그러한 까닭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렸고, 앞뒤를 헤아려 수긍 할 수 있을 때 비로서 다음 장을 넘겼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도 공부하면서 물어보기를 좋아했던 다산을 부친은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부친으로 인해 총명하고 부지런한 다산은 대학자가 될 그릇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p. 79, 다산은 어려서 부터 이렇게 학문(묻고(問) 배우는(學)에 정진하였다)

2. 다산을 따라잡는 독서 비법 <1>: ‘정독(精讀)’: ‘묵독(默讀)과 행간독서(行間讀書)’

다산은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책 읽는 소리가 가장 맑고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기에 책 읽는 소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다산은 책을 읽을 때 정독을 강조했다. 책을 읽을 때 아주 꼼꼼하게 자세히 읽는 것이다. 한 권을 읽더라도 글에 집중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내용을 정밀하게 따지면서 읽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나서야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다산은 강조했다” (p. 100, 서평자도 대체로 정독주의자다. 그래야 서평을 쓸 수 있다)

다산의 독서법은 독서하는 데 ‘삶의 태도를 투영’했다. 이것이 다산이 대학자로 우뚝 설수 있었다. 다산은 정독의 방법으로 묵독과 행간독서(行間讀書, read between the lines)를 권했다. 눈으로 읽는 묵독(默讀)은 개인성이 강조된 독서행위다. 저자의 책을 비판적으로 읽도록 하며, 자아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한다. 행간독서는 독자의 지식적 배경을 활용해 글의 뜻을 음미하며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보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독서하면서 하나의 주석에만 의존하지 말고 많은 자료를 참고해서 지식의 근본까지 파 해치며 철저하게 읽는 독서를 했다. 눈으로 읽기, 행간 읽기, 근본을 찾아 읽기. 다산이 활용했던 독서법이다”(p. 101, 오늘의 석.박사과정 이상 리서치 학생들의 공부법이 아닌가?)

3. 다산을 따라잡는 독서 비법 <2>: ‘질서(疾書)’: 깨닫은 것을 빨리 메모했던 방법

질서(疾書)는 송나라 때 학자 장재(張載)가 정몽(正夢)을 지을 때 집안 곳곳에 붓과 벼루를 놓아두고 생각이 떠오르면 잊지 않기 위해 밤중에 자다가 도 벌떡 일어나 등불을 켜고 메모한 데서 연유했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떠오를 때 잊지 않기 위해서 빨리 메모하기다. 다산의 스승,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조선 후기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주장했다. 성호는 스스로 깊이 파서 연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남의 것을 본뜨기만 하는 학문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곧, ‘저자는 왜 이런 주장을 할까?’ 의심을 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

다산은 질서의 첫 단계로 먼저, 책의 내용과 주장에 대해 회의를 갖고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독서를 하여 자득(自得)을 이룰 때까지 회의, 곧 질서를 반복해서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의심하며 읽으며 기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기록을 통해 사고의 발전이 있고 학문이 성장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사 초록하는 공부는 아직도 손대고 있지 않느냐? 젊은 사람들이 멀리 보는 눈과 달관하는 점이 없으니 탄식할 일이구나. 군데군데 의심이 가고 잘 모르는 곳이 있어도 질문할 사람이 없어서 한스럽다고 했는데, 과연 그처럼 의심이 나서 견딜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적어서 인편에 (나에게) 부치지 않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이 스승과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p. 134, 다산이 자기 아들에게 다그친다. 거저 읽기만 하지 말고 질문 사항을 하나하나 메모해 자신에게 왜 보내주지 않았느냐고. 다산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이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 느냐’고 했다. 서평자도 다산의 견해에 100% 동감이다)

서평자도 오래전부터 독서를 즐기면서 의심과 질문을 많이 제기하였다. ‘왜, 어떻게’ 스스로에게 하거나 저자에게 질문한다. ‘다른 방법을 없을까?’, ‘정말 이 방법이 효율적일까?’. 유대인의 전통적인 학습법, 하브르타(havruta)는 두 명이 짝을 이루어 서로 질문하고 답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요약하면, 질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며 메모하는 독서이다.

4. 다산을 따라잡는 독서 비법 <3>초서(鈔書): 만들 책의 중요한 부분 글을 베꼈쓰기

다산이 활용했던 ‘초서는 책을 쓰기 위한 책읽기’다. 다산은 자식들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초서를 특별히 강조했다. 다산은 초서의 습관을 들이면 핵심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지식의 폭이 넓고 깊어 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들에게 보내 다산의 편지 글이다.

“고려사는 할 수 없이 빨리 되돌려 보내주어야겠다. 그 가운데서 뽑아놓은 것의 뜻은 네 형에게 자세히 배워라. 아무튼 이번 여름 동안에는 너희 형제가 온 힘을 기울여 고적사에 초촬(抄撮, 베껴 쓴 것을 모으는 일)하는 일을 끝마치기 바란다. 초서하는 방법은 반드시 먼저 자기 뜻을 정해 만들 책의 규모와 목차를 세운 후에 비로서 남의 책에서 간추려내야 조리에 들어맞는 묘미가 있다” (pp. 158-59, 다산은 두 아들에게 초서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조선후기 최고의 독서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평생 2만권의 책을 읽고 수 백 권의 책을 베겼다고 한다. 책에 관해서 이덕무는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독서량을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덕무는 초서의 효과적인 독서방법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이 손으로 한 번 써 보는 것만 못하다. 대개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르는 것이므로 비록 스무 번을 읽어 왼다 하더라도 한 차례 힘들여 써보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p. 159, 신.구약 성경필사의 엄청난 유익이 역시 그러하다)

대표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 할 때 다산은 중국의 23가지 역사책과 우리 나라 역사기록 및 각종 문집에서 옛 목민관의 자치사례를 뽑았다. 이런 방대한 작업은 강진 유배시절 제자와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 저술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듣고 본 실례까지 초록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목민에 관한 책을 저술할 계획이 있었기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관리의 횡포나 백성의 고달픈 삶 등을 사례사료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산의 머리속에 스친 모든 생각들은 사라지지 않고 초서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배 18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정보를 조직하는 다산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다. 복잡하고 산만한 정보도 다산의 손을 거치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p. 173, 서평자도 다산의 3박자 독서법대로 계속 독서와 서평쓰기에 계속 하는 중에, 초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

나가는 말(결론): “참 지식인 다산의 삼박자 독서법: ‘정독/질서/초서’
“오래된 본성, 호모-리더스(homo-readers)여 영원하라!” ‘勤力讀書鈔書著書’
“독서와 초서와 초서에 힘쓰도록 하라” → ‘다산형 21세기 인재, multitasker!’

21세기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시대, 이즘에는 유튜브, AI시대다. 실용화(實用化)를 촉구하고 있다. 다산은 18세기 수 많은 정보가 중국을 통해 유입되고 서적의 범위와 종류 또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새롭게 등장하고 지식인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대였다. 2-3세기 전시대처럼 현대를 사는 이 시대에 다산처럼 정독/질서/초서의 독서법으로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지식인. 다산형 21세기 인재형(人才形)인 멀티태스커(multktasker)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나야 할 것이다.

“다산의 독서법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 후대에 대한 사랑과 기대, 바른 인생관 가치관이 들어 있다. 책을 읽을 때는 동기와 목적이 중요한다. 목적이 있는 삶이 중요하듯이 목적 있는 책읽기가 중요한 것이다” (p. 179, 다산의 수원화성 건설과 거중기 개발이 증거).

정조는 조선조의 붕당정치(朋黨政治)의 다툼에 희생되어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아버지의 능을 옮기고 이를 기념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시 건설을 작정했다. 다산은 정조의 명에 따라서 화성(현재의 수원시)성곽 설계와 거중기 개발로 10년 이상 예상되었던 화성 공사를 2년 반 만에 완성하여 오늘날 신도시 건설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다. 다산의 3대 저서: 경세유포(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도 모두 다산의 세상을 보는 따뜻한 마음과 후대에 대한 사랑과 기대에서 저술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대역죄인/사상가/지식인/혁명가/’호모-리더스의 전형’, 21세기 인재형!

“우리에게도 이런 인물이 있다.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가 남긴 가치에 대해서는 제대로 일지 못했던 사람. 왕의 기대와 후원 속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서학(西學)’에 심취했던 탓에 일생의 많은 시간을 유배와 감시 속에서 살았던 대역죄인. 행함의 가치를 철학으로 삼았던 사상가. 유배라는 고통의 시간에 살아 있는 지식의 보고를 일구고 남겼던 지식인. 정신과 법, 기술개혁이 오늘의 부패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던, 세상과 사람을 사랑했던 혁명가, 250년이 지난 오늘, 읽기가 곧 삶인 ‘호모-리더스’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준 사람. 그는 다산 정약용이다. 이 책은 고민 없이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정형화된 비법과 기술 대신, 진정한 책 읽는 인간인 ‘호모-리더스’가 가야 할 어렵고 힘든 길,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세상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덕목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이 우리의 오래된 능력, 책 읽는 사람 또는 읽음으로 존재하는 ‘호모-리더스’의 영광과 감격을 다시 일깨워 줄 각성제가 되리라 감히 기대해본다” (추천사 중 <교보문고 독서경영 리더 이우일>, 본서의 뒤 표지 글).

전세계 선교현장의 시니어 선교사들, 은퇴하는 목회자들께…

“견문이 넓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열매 맺지 못하는 꽃과 같다. 어느새 떨어져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을 쓰면서도 널리 알지 못하는 것은 깊이가 없는 물과 같다. 어느새 말라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p. 200,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서평 후기>

서평자는 3년전, 한국 방문중에 ‘알라딘 중고서점 이수역점’을 둘러보았다. <다산의 독서전략> 책 제목이 눈에 뻔쩍였다. 다산 정약용은 한국역사를 배우며 그에 대한 호기심이 지대하였다. 다산과 그의 형제들은 서학(천주교)에 깊이 매료되었다. 본서를 읽으며 만약 다산이 정조의 총애를 받지 않았다면, 그는 조선의 천주교 ‘4대 박해’로 희생되었을 것이며, 18년의 유배생활(40-57세)은 정조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favor)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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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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