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배안호 선교사.
배안호 선교사.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선물 같은 책이다’

들어가는 말(서론)

‘남.북의 통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우리는 당장 ‘이것’을 준비하자’
금년 10.3일(개천절)은 독일 통일 35주년이다. 이제는 남.북 조국통일 ‘하늘문이 열릴 것!’

“왜 책 제목이 ‘부란덴부르크’ 인가요?”. “독일처럼 우리도 갑자기 통일이 될까요?” “동.서독 통일을 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남북통일이 계속 지연되고 있나요?” “나도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어린 시절에 ’우리의 소원 통일’(노래) 많이 불렀다. 이즘은 8.15광복절에도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있다. 넘 슬프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늘품풀러스, 2020)은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선물 같은 책이다. 비망록(備忘錄, memorandum)은 사건이나 관찰 결과를 기록하여 기억을 돕는 문서다. 저자는 남북통일을 꿈꾸며 통일부서만 28년 근무했다. 독일대사관 통일연구관(1992-94)과 14개부처 공무원들로 구성된 독일통일 연구단의 단장(1995)으로 독일통일 과정에 참여했던 통일의 주역들을 60여회 직접 면담했다. 본서는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저자의 박사논문이다. 대학교(북한학과 통일연구단체) 교재로 선정되었다. 명사들의 ‘내 인생의 책’이 되었다.

“1989년 12월 25일 성탄절, 동베를린 극장에서 레나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감격과 환희의 도가니 속에서 연주되었다. 이 곡은 165년 전 베토벤이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초연된 이후로 수 없이 연주되었지만, 이날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축하하는 공연이었다. 제4악장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iheit)’는 ‘자유의 송가(Ode an die Freiheit)’로 바뀌었다. 동독 시민들에게 자유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기적을 찬양했다. 동.서독 국민들은 이미 ‘형제의 재결합’, 즉 통일을 노래하고 있었다” (p.10 저자, 서문. 저 ‘환희의 송가’/’자유의 송가’가 이제 곧 평양과 서울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다시 결합시키는도다/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독일 통일의 상징은 문
이 문은 독일인이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던 프로이센 제국시절 1791년에 세워졌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겼을 때는 ‘승리의 개선문’이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냉전시절엔 ‘대결의 문’/동.서독의 ‘분단의 상징이 문’이었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을 이룬 후에는 동.서독 사람들의 ‘만남과 축제의 문’이 되었다. 이제는 독일 통일의 상징의 문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Brandenburg memoirs)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늘품풀러스, 2020) 본서는 독일통일의 숨가쁜 기간(1989.5.2–1990. 10.3) 역사적 사건 당시 독일통일의 주역들의 생생한 증언이요, 비망록(備忘錄)이다. 본서는 2011년 출판되었으나 독일통일 30주년 맞아 2020년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나는 통일을 바라는 것을 넘어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이 책은 이러한 소명의식이 낳은 작지만 소중한 열매다” (저자 양창석, 초판 서문) 일평생 조국통일 염원을 담은 저자의 ‘찐고백’이다.

주독일 대사관, 주미국 대사관 통일관으로 근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뉴욕) 북한정책과장, 통일부 대변인, 사회문화교류 본부장, 남북출입사무소장, 정세분석국장을 거쳐 남북회담본부 상근회담대표이다. 통일부기획조정실장/남북회담 본부장. 개성공업지구 지원재단 감사. 현재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초빙교수.선양하나재단 한국대표이다. 양창석 대표는 임박한 남북통일을 위해 어떤 모양으로 든지 큰일을 감당할 ‘잘 준비된 그릇’이다.

전체 6장; 제1장 시민혁명으로 동독이 무너지다. 제2장 서독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나? 제3장 화폐통합으로 사실상 통일이 되다. 제4장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다. 제5장 대외적 걸림돌을 제거하다. 제6장 독일 통일의 교훈: 우리는 어떻게 통일을 해야 하나? 부록: 독일통일 과정 연표 33페이지(pp.351-65). 서평자는 1, 2장과 제6장 ‘독일통일의 교훈’을 중심으로 간단히 서평을 할 것이다.

1. ‘시민 혁명으로’ 동독이 무너지다. 전환점: “동독의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
저서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이미지.

“1989년 5월 2일은 독일 통일로 가는 첫 관문이 열린 날이다.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항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 국경지역에 설치된 철조망을 철거한 것이다” (p. 20 , 서평자는 항가리가 독일통일에 큰 역할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동독인들은 동독을 떠나기로 결심했는가? 서독의 물질적 풍요/자유에 대한 갈망/여행의 자유제한과 시민참여 부족에 대한 불만이었다. 한마디로 동독 정권에 대한 거부와 국가의 정통성 상실에 비롯된 동독 주민들의 ‘발에 의한 결정(Abstimmung mit den Fuben)’이었다. 그럼에도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필요한 개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항거리는 동독을 버리고 서독을 선택했던 것이다.

서독정부는 동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주민에 대한 유일대표권을 계속 견지했다. 동독 탈출민들을 서독시민으로 빨리 정착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다. ‘동독의 고유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정책이 결실을 맺게 했던 것이다. 서독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이 돋보였다.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월요 예배 집회: 동독정권의 붕괴는 동독지방선거(1989.5.7)의 부정에서 비롯되었다. 항거리를 거쳐 동독주민들의 서독으로 탈출하고 있는 동안 동독 내부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 되었다. 니콜라이교회 월요예배 참석자 수는 100명에서 2,500명으로 늘어났다. 여행의 자유는 라이프치히 월요기도회와 시위자는 1만명에서 계속 불어났고 강력한 진압할수록, 월요 데모는 30만-50만명으로 규모가 늘어만 갔다.

“독일 통일이 평화적으로 달성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동독의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독일 통일 20주년을 기념해서 독일 연방정부가 발간한 <독일통일백서 2010>은 동독의 평화적 혁명을 “독일 역사상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며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 (p. 49, 물론 시위 주도세력은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와 베를린의 겟세마네 교회에서 먼저 평화예배를 드리고 시위를 하여 평화시위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각오가 더욱 더 강하였던 것이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실수’: 동독 공보비서의 저녁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법 발표’
베를린 장벽 장벽의 개방은 “의도적이고 정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동독지도부는 여행규제를 완화하려 했을 뿐이었다” (p. 53, 역사의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드디어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지다 →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종착역 도착’

왜 붕괴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첫째는 동독주민들의 개혁 욕구, 여행.언론 자유와 자유선거 요구에 부응하는 시의적절한 개혁조치를 못했다. 둘째는 서독의 실상을 체험한 동독주민들의 실망과 불신이 증대되어 동독 정권에 대한 정체성/충성심을 잃었다. 셋째는 저항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들 수 있다. 당시 여타 동구국가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변혁은 동독 내 민권운동가와 단체들이 저항운동의 전기가 되었다.

2. 서독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나?: ‘동독의 안정화를 목표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서독 당국이 동독 안정화를 정책 목표로 한 이유: 첫째, 동독이 붕괴할 경우 통제불능 상황이 되고 추후에 재건상의 어려움을 우려했다. 둘째, 동독 주민의 일상생활과 심리상태를 안정시킴으로 탈출 도미노현상을 방지하였다. 셋째, 동독사회가 제대로 작동되게 실질적 지원을 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이 동독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한편 서독정부는 헝가리와 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에 몰려온 동독 탈출민을 서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외교적 총력을 기울였다. 서독은 독일 전체에 대한 유일대표권을 주장하면서 동독의 고유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독 주민도 독일국적을 소지하게 되는 바(기본법) 서독으로 오는 동독인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동독의 개혁을 통해 주민들이 동독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동.서독 정상회담과, 1990년 1월 1일부터 서독 여행자에 대한 최소의무환전 및 비자의무폐지, 동서 화폐간 공식교환율(3동독마르크:1마르크), 12월 22일 브란텐부르크 문의 완전 개방에도 합의했다.

3. 화폐통합으로 사실상 통일 되다: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거기로 간다”

“코르바초프가 없었으면 통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독 내독관계성 마지막 차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군비증강 정책이 없었으면 고르바초프도 없었을 것이다”

서독의 탄탄한 경제력(A+ 성적표) → 동독과의 화폐.경제 통합조약을 통해 조기통일 가능.

“1988년 3.8%, 1989년 4.5% GNP성장, 1988년 재정 적자는 GNP 대비 0%, 자본수지는 1988년 1,275억 마르크, 1989년 1,356억 마르크 흑자, 1988년 추가 일자리 창출 120만명, 이것이 통일을 앞둔 서독의 경제 성적표였다. 서독 경제는 통일을 위해 유리한 재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내독성 차관이었던 프리스니츠는 “서독의 경제력과 재정 상태가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통일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p. 102)

4. 독일 통일의 교훈: 우리는 어떻게 통일 해야 하나?

동.서 분단국이었던 독일 통일된 것은 우리도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던 동독이었다. 동독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개신교의 본산이었다. 결국은 교회가 통일의 물꼬를 열었다.

2차 세계대전후 전승 4대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분할 점령된 후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독일이 분단된 후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대거 탈출하자(1949-61 약 300만명),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13일에 베를린 장벽(Die Berliner Mauer)을 구축했다.

28년간 독일 내부의 국경선의 일부로서 냉전의 이념적/정치적 분열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무너졌던 것이다. ‘155’km 서베를린을 완전히 감싼 순찰로는 우리의 휴전선 ‘155’마일(248km)과 숫자까지 같지 않은가? 서평자도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았다.

동서냉전시기에 동독을 지탱해 준 것은 3가지: 소련 주둔군(38만명)/베를린 장벽/그리고 교회였다. 특별히 교회는 동독 정권 하에서 살아남은 조직화된 시민단체로서 불만세력들을 수용함으로써 일종의 배출구 역할을 감당하였다.

28년후인 1989년에 이들 3가지는 더 이상 동독정권을 지켜주지 못했고 동독주민들의 대규모 탈출러시와 데모에 베를린 장벽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전승 4대국과 ‘2+4 회담’을 통해 동.서독 통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독일은 어떻게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저자는 8가지 요인을 밝혔다)

첫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우월한 서독 체제의 강한 흡인력 덕분이었다. 둘째, 서독 정부의 서구 편입 정책과 미국의 강력한 지지 덕분이었다. 셋째, 소련의 안보 우려를 해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넷째, 콜 수상과 겐셔 외상, 텔칙 보좌관 등 서독 정치 엘리트들의 전략적 결단과 능력, 외교적 역량이다. 특히 콜 수상은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외교적 능력으로 “기회의 창”이 열려 있을 때 통일을 달성했다. 다섯째,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련의 대 동구 정책 변화 덕분이다. 여섯째, 원칙에 바탕을 둔 서독의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교류협력 정책이다. 서독 정부는 기본법에 명시된 민족의 재통일이라는 명제를 포기하지 않은 가운데 현실적 관점에서 통일을 위한 실천 가능한 정책을 추진했다. 일곱째, 자결권(self-determina tion) 원칙의 고수이다. 마직막으로, 독일의 통일은 역사적 행운이었다. 사실상 서독의 정치인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통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도 통일 할 수 있다”(양창석 박사의 7가지 제언은 현실성 있는 통찰력 있는 제안!)

독일 통일은 우리게 ‘전차복철(前車覆轍) 후차지계後車之戒)’-앞사람의 실패는 뒷사람의 교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7가지를 제시하였다. (pp. 307-350)

- 민족 자결권을 명문화하자
- 우리의 경제력을 키우자
- 국제적으로 친분과 신뢰를 쌓아 나가자
-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 북한을 더 깊이 알자
- 각 분야별 통일 준비를 서두르자

서평자가 볼 때, 양창석 박사가 제안하는 7개의 제언 가운데 첫번째, ‘민족자결권’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 통일의 과정에서 주변국, 특히 중국과의 이해관계가 큰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의 그날이 올 때 주변국들이 한반도 통일과정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선제적으로 ‘자결권’을 우리 헌법에 명문화해야 한다. 서독의 기본법 전문에 “전체 독일 민족은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완성해야 한다”라고 규정한 것처럼…

서독이 동독에 대한 유일대표권을 고수한 것이 통일을 촉진한 요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헌법에 영토조항을 갖고 있어야 유일대표권을 국제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남.북통일을 위해 50년이상 기도하고 있는 서평자가 볼 때, 민족자결권을 헌법에 명문화하기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 백성들/정치인들이 큰 눈을 뜨고 멀리 보는 눈이 열린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하심으로 지난(至難)하게 보이는 ‘자결권’이 헌법에 명문화 될 줄 확신한다.

나가는 말(결론): ‘통일은 곧 봇물이 터지듯, 산 사태처럼 올 것이다’ (이춘근 박사)

“우리에게 기회의 창이 열릴 때 이 책이 통일의 종착지로 안내하는 멋진 네비케이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양창석)

독일의 완전 통일(1990.10.3)은 분명 우리의 반면교사(反面敎師)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전차복철(前車覆轍) 후차지계後車之戒)’이다. 당시의 국제관계와 정치.경제.외교.국방 등 각 분야의 통일주역들의 생생한 주옥의 비망록(memoirs)/역사다.

“내가 만났던 통일의 주역들이 전해준 생생한 증언들을 풍부하게 추가했다. 또한 콜 서독 수상, 부시 미국 대통령,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대처 영국 수상 등 독일 통일 과정에 참여한 국가 수반들의 회고담도 반영했다. 이 책은 이들의 경험을 가감 없이 전달함으로써 우리에게 통일의 기회가 올 때 어떻게 통일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목적을 두었다” (p. 13, 저자의 2011년 초판 서문, 대한민국의 남북통일의 귀중한 지침서다)

저자는 전 생애를 남북문제 실무자(통일부에서 28년간 근무)로 살아온 삶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다. 더 더욱 귀한 것은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자적 자세를 칭찬하고 싶다. 본서를 쓰기위해서 독일통일의 주역들과 60여회 면담을 하며 생생한 역사를 기록에 담았다. 그래서 책 제목,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그대로다.

서평자는 본서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7가지 남북한 완전 통일을 위한 제안을 바탕으로 서너 가지 현실적 제안을 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만 통일문제를 접근하게 되면 통일의 대로는 더욱 더 험난하게 될 뿐일 것이다).

첫째는 동서독과 한국의 남북한 관계는 본질적으로 많이 다르다. 오로지 한 나라였는데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어렵더라도 대화를 계속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통일의 대로는 언제든지 산 사태처럼 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서 저자가 제안하였듯이 민족자결권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작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남북 분단이래 지금까지 교회는 끊임없이 남과 북의 완전한 통일을 위하여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처럼 기도의 횃불을 계속 높이 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코앞에 두고 있다. 교회를 비롯 각 사회단체에서 임박한 통일을 위한 집회와 모임들이 곳곳에서 준비되고 있다. 다음 주간(8.4-8.7)엔 영국 런던에서 약 500명의 한국인.영국인들이 모이는 ‘영국 & 유럽 통일컨퍼런스’가 런던에서 열린다. 올해(2025)는 동.서독이 완전 통일된 지 35주년이다. 대한민국, 조국의 하늘이 열린 날(개천절), 10.3일에 우리 대한민국에도 통일의 하늘이 수년내 곧 열릴 것이다. 아멘 아멘.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도산 안창호)

<서평 후기>

서평자는 지난 6월 10(화)-13(금) 독일 뭰헨, ‘미션유럽 컨퍼런스 포럼’에서 양창석 박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2023년 말 북한의 ‘2민족, 2국가-분단고착화’ 대남 통일정책, 최근 김정은의 ‘베를린 장벽’- ‘평양문화어보허법’(2023.1) 등에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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