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본 서평을 2번에 걸쳐 나눠어 올립니다’

영국 배안호 선교사.
배안호 선교사.

4. 교육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두 사람은 정치가로서 이상과 꿈이 비슷했다. 나라를 바꾸는 것은 교육밖에 없음을 깨닫았다. 카이퍼 시대의 유럽은 좌파들의 세상이었다. 과학주의/인본주의적 세계관이 만연하였다. 좌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상을 가진 자들을 기용하고 신본주의 학자들은 설 땅이 없었다. 국립대학교수들이 좌파적 사상이 주류였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브러함 카이퍼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서 1880년 개혁주의 자유대학(Universitat Libera Reformata)를 설립했다. 교수와 학생 각각 5명으로. 자유대학의 개교 이념은 그 유명한 ‘영역주권 사상(Souvereiniteit van Eigen Kring)’. 코끼리 위에 파리 한 마리가 앉은 격이었다. 네델란드 시민은 점차 카이퍼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가 추구하는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의 세계관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한 사람의 결단으로 세계적 유명한 자유대학이 된 것이다.

“자유대학교에서 배출된 기독교적 석학들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진을 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개교 140년이 지난 지금은 처음 개혁주의 정신이 다소 퇴조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정치, 법률, 신학, 철학, 문학, 역사, 공학, 의학, 물리학 분야에는 ‘그리스도 왕권을 귀중히 여기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중략) 그리고 카이퍼의 교육 개혁의 열정은 대학에만 그치지 않고, 사립 기독교 고등학교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사립학교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가 기독교 고등학교, 기독대학이 많이 생겼다” (p. 36)

이승만은 왕을 폐하려는 운동에 가담했다가 6년여 감옥생활 중 그는 어학을 뚫어내고 다양한 책들을 탐독하여 실력가가 되었다.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다. 옥중생활 중 죄수의 신분임에도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며 이후 교
육사업에 올인하였다. 한인학교를 비롯 인천의 인하대학 설립.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의무교육 통해 전국민 문맹자가 없게 하였고 수많은 국비장학생을 뽑아 미국에 유학 시켰다.

5. 연설가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100여년 전에는 사실상 연설과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명연설가, 명설교가 일수록 수 많은 사람이 운집하였다. 미국의 마르틴 루터킹 주니어의 “I have a Dream”, 아브라함 링컨의 바연설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of the people”, 존 에프 케네디와 오바바 대통령의 연설을 우리는 기억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 또한 연설과 설교의 명수였다. 그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화란의 유명한 전직 수상출신의 후룬 봔 프린스터(Groen van Prineetere)의 후계자가 된 것도, 그의 감동적인 연설 덕분이었다.

“카이퍼의 연설의 요지는 “교육개혁 없이 나라가 바로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교육 시스템은 유물주의 진화론자들이 모든 교육 시스템에 똬리를 틀고 있었으므로 이애 대항하여 건전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교육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요지로 발을 굴리며 명연설을 쏟아냈다. 결국 카이퍼의 연설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카이퍼는 이외에도 각종 모임, 심포지엄, 세미나, 국회 연설에서 전 국민에게 호소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사상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어 갔다” (pp. 39, 40)

“이승만은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이승만도 대중 연설가였다. 그는 평생 독립운동가로 살면서 설교와 강연이 일상이 되었다. 강연에는 또렷한 사상과 논리가 있어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의 강연은 한결같이 조선의 독립이었고 조선의 대안은 ‘기독교’였다.

“이승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뒤집어진 사람이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로 조선 민족이 새로워지는 것이 그의 꿈이자 메시지였다. 그는 외교의 귀재이기도 했지만, 예수로 꽉찬 연설가였다. 이승만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조선이 독립할 수 있고, 민족이 해방되는 것은 민족끼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면서 단합하여 일본을 물리쳐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의 모든 연설과 설교에 녹아 있다 (중략) 사실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한민족을 계몽하고, 주미 한국인들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메시지를 늘 했었다” (pp. 40, 41, 이것은 모두, 프린스턴 신학교서 ‘기독교변증학’, ‘바울 신학’ 등을 공부하였기에 그의 설교와 연설의 바탕은 언제나 민주주에 기초하는 기독교 신앙으로 결론지어졌던 것이다)

6. 정치가와 국제맨으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두 사람은 그 시대의 국제맨이었다. 글로벌 지도자가 되려면 출중한 어학 실력과 더불어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적 비전을 겸비하여야 한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몰락한 이조와 나라를 빼앗긴 채 망명하여 40년간 고생하며 지도자로 준비되었다. 그는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의 치욕을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며 외교적 노력과 아울러서 자유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다.

이승만이 이렇게 국제맨으로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며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 제나바 레만 호숫가 한 식당에서 만나 가정을 이룬 프란체스카 도너(Franziska Donner, 1900-1992)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도나는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대학민국의 오른팔이 되어 크게 활약했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갈 때도 평생 썼던 타이프 라이터를 가져갔다.

“아직도 컴퓨터가 없던 시절, IT가 없던 시절의 그 타이프라이터의 모든 것이 외교문서였고 미국과 세계지도자들과 소통하는 이승만의 손과 입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이후의 외교에서 프란체스카 도너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p. 55)

카이퍼는 그렇게도 바쁜 일정에 참모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서 D.L Moody 천막집회에 참석했다. 더구나 총선이 있던 해에 성령충만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남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을 순방하고 500페이지 분량의 두 권의 여행기를 남겼다. 카이퍼는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며 세계를 꿈꾸는 여행가였다. 미국은 물론 포루투갈, 스페인, 모로코, 튀니스, 수단, 이집트, 이슬람의 모든 나라, 헬라의 모든 나라였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중심국가가 되도록 터를 닦는 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그의 시선이 어디를 보는가가 중요하다. 눈앞에 있는 유익만 보려는 사람은 생각이 너무나 좁다. 사실 이승만 시대에도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은 대륙 세력이 유일한 줄 알고 중국과 구소련으로부터 무슨 지원과 경제적 유익을 보려 했지만, 이승만은 태평양 넘어 있는 미국과 유럽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는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p. 57, 지도자의 시선이 한 개인/회사/국가의 미래를 결정함을 확인한다)

7. 기독교 입국자로서 카이퍼와 이승만

이승만과 카이퍼는 지구 반대편에 살았지만 그들의 인물됨과 정치가/설교가/연설가/저널리스트로서 삶이 궤적이 많이도 닮았음을 확인하였다. 사람은 일생동안 누구와 만났는가? 누구의 사상을 접했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방향이 완전히 정해지는 것이 정한 이치다.

아브하람 카이퍼(1837-1920)의 시대는 사상적으로 대혼란의 시대였다. 19세기,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과학주의, 진화론으로 교육은 망가졌고, 특히 교회는 병들었던 때였다. 오늘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유럽교회는 중병을 앓고 있고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도 또한 그렇다.

교회 역사에서 유명한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 1618-1619)는 네델란드 도르트에서 개최된 국제회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구원/교회/신자의 삶이 명백히 규명된 회의. 그런데, 자유주의 운동의 진원지인 라이덴 대학의 교수들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과 신앙 체계를 뒤엎고 새로운 신학을 발표했다. 본래 화란은 개혁주의의 중심이었다.

카이퍼는 그 자신이 확실한 칼빈주의자로 거듭나면서 새 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교회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고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교회를 세우자!”라고 역설했다. 결국 뜻을 같이 하는 목사들과 성도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 논선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이퍼는 말 그대로 개혁교회(Gereformeerd Kerk)를 세우게 된다” (p. 66, 모든 성경적 교회는 개혁교회다)

여기서 교회만 개혁하는 것이 아닌,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 개혁주의 사상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의 개혁교회 된 교회 “재개혁교회”가 정확한 뜻이다. 카이퍼는 우리의 삶 전부가 성경적 세계관, 기독교적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입국론’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지는 기독교국가 설립이 꿈이었다.

이승만의 꿈도 대한민국을 기독교적 진리위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6.25 전란으로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부산 초량교회로 피난온 목회자들에게 나라를 위한 기도해줄 것을 요청을 하였다. 군대의 군목제도 만들어 군복음화와 민족복음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한미방위조약를 체결로 오늘날의 한국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게 하였다. 사실상 이승만의 건국정신: 자유민주주의/한미동맹/기독교입국론/자유시장경제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기초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가는 말(결론): ‘두 사람의 중핵사상(中核思想)은 위대한 칼빈주의자가 공동분모’

“’칼빈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승만과 카이퍼는 시대를 초월하여 한 시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확인하였다. 서평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이승만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확실하게 역사적 칼빈주의를 공부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일제치하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독립위해 역사의 격랑(激浪)을 헤치며 마침내 대한민국을 굳건히 세운 건국대통령 이승만! 그는 1908년 프린스턴 신학교서 공부하며 확실한 성경적 세계관을 위에 나라를 세우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기초는 6년의 한성감옥에서 성령체험과 엄청난 독서와 영어 통달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가슴으로 받은 ‘칼빈주의’는 무엇이었을까 ? 한마디로 칼빈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당 울타리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법조계 등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이 주인이란 ‘하나님 중심 세계관’이요, ‘성경 중심 세계관’이란 것이다.

이승만은 신학사(M.Div.)학위는 없지만 당대의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까지 배우며 신학의 핵심과목인 기독교 변증학과 기독교 윤리학, 바울신학 연구 등 과목을 공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B.A), 하버드 대학교(M.A), Ph.D를 취득한 것은 그의 명석한 두뇌와 더불어 탄탄한 어학실력으로 최단기간 미국 최고의 엘리트 과정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평자는 정치적, 사상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이때에, ‘카이퍼나 이승만’과 같은 바른 성경관과 세계관을 가진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감사하게도 106세의 연세에도 김형석 교수는 지금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에 정기적으로 컬럼을 계속 쓰고 계신다. 본서의 저자, 정성구 교수는 카톡으로 명쾌.상쾌.통쾌한 ‘시론 글쓰기’로 국내외 십 수만 독자들에게 바른 성경관/세계관으로 세상을 읽게 하고 있다. 본서를 읽으면서 서평자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정성구 교수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꼴임을 확인하였다.

서평 후기

서평자는 지난 봄 3,4월에 한달간 한국방문 중에 칼빈주의연구원과 칼빈박물관의 정성구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칼빈과 칼빈주의 희귀자료들, 교부 신학의 폴리갑,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 초대 교부들의 원전이 16세기 구텐베르크 활자체로 찍어진 책들도 보관되어 있었다. 16세기 칼빈의 작품을 비롯해서 아브라함 카이퍼까지 칼빈주의 학자들의 서책, 그림, 문헌 자료들과 또한 한국교회사 희귀 자료들도 두루 살펴보았다. 벌써 5,6번째 방문이지만 볼때마다 감탄과 감사가 절로 나왔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나의 여사의 자료들도 반가웠다. <역사를 바꾼 카이퍼와 이승만> 본서를 비롯 몇 권의 교수님의 저서를 선물 받았다. (끝)

배안호 선교사(영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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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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