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대대로 유교적 관습과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교인은 경박하게 행동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인식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실제 기질은 이탈리아인처럼 아주 감정적이다 못해 격정적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도 외적으로만 경건하려드니 지정의의 전체적 균형이 이뤄질 리가 없다. 당연히 한국 신자들 대부분이 감정을 잘못 절제하여 실패한 경험이 성공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결과 감정은 신앙성숙의 중요한 대적으로 꼽히게 되었고 영적인 문제와는 아예 연결시키지 않으려고까지 한다.

바꿔 말해 많은 신자들이 경건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종교적인 말과 행동과 몸에 밴 태도에서 경박성을 제거하고 대신에 온유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을 띄면 경건이라고 착각한다. 예컨대 제사 지낼 때에 절도 있게 행하는 것 같은 모습이 경건함의 대표가 되었다. 경건은 모양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능력으로 판정해야 한다.(딤후3:5)

성경은 경건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 가운데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으니라.”(딤전3:16)

상기 세 구절 모두 경건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를 한 마디로 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경건한 자다. 신자가 인위적으로 성격, 태도, 습관을 고치고 훈련해서 엄숙한 종교적 모습을 취하는 것과 성경적 경건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따라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 당연히 경건의 능력도 나타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임재 하는 하나님의 전이 이미 되었기 때문이다. 경건의 능력이란 신자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얼마나 그분의 인도대로 따르느냐는 싸움에 좌우된다. 역으로 말해 성령의 권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는 자연히 경건의 모습도 띄게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경건이 절대 종교적으로 엄숙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엄숙해야 할 경우도 있지만 경건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초대교회 당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는 말씀의 앞뒤 문맥상의 정확한 의미는 말세에 예수를 몰라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자기와 돈을 더 사랑하여 심판이 예정된 자들을 칭한 것이다.(딤후3:1-4) 그래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6:5)들이 오히려 더 종교적 외형적 경건을 강조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더 깊이 깨닫기에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고후5:15) 된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분과 깊이 교제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 세상 땅 끝까지 동행하게 된다. 그분이 바로 진리이기에 오직 그분을 앎으로써만, 즉 진정으로 경건한 자가 되어야만 자유함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자유함도 그분의 도우심으로 기도하여 모든 환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분의 뜻만 따라 사는 것이어야 한다.

경건은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찌할꼬?”라고 구원을 간절히 소원하는 절규가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럼 성령이 간섭하여 그분의 조건 없는 긍휼을 받아들인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감으로써 생전 처음 온전한 평강과 위로와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신자가 된 후에는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노력하다가 때때로 실패하게 되면 여전히 죄의 권세에 눌려 있는 자신의 영적 실체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자기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붙들어주심을 깨닫고 진정한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오직 그분께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을 때까지 세상 앞에 그분의 사신이 되어 그분이 시키는 일만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 경건이다.

예수에게만 붙들려 자유로워진 모습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도덕적 종교적 경건과는 훨씬 다르다. 예컨대 예배 중에 설교 말씀을 듣고 눈물이 주체 할 수 없이 흐르거나 자기도 모르게 아멘하고 크게 소리칠 수 있다. 또 환난 가운데 주님의 구원을 갈구하며 기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 의심, 불신앙까지 갔다가도, 기도 중에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확신하게 되면 다시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울다가도 웃으며, 웃다가 울기도 한다. 남들이 보면 경박하다 못해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성경적 경건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자로선 도저히 흉내조차 못내는 모습이다. 아니 아예 그럴 수도 없고 그런 영적 상태로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정상인이 특별한 의도가 없는 한 어떻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 진리를 모르고 성령도 없이 오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경건을 가장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겉으로 경건해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여겨줄 것을 기대 내지 계산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그에 비해 성경적 경건의 비밀이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십자가 예수를 알기에 그분을 따라 가기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기에 세상의 보이는 것에 전혀 좌우됨 없이 성령의 인도대로 신자의 내면적 질서가 적절하고도 합당하게 작동되는 것이 바로 경건이다. 특별히 신자에게 어떤 감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자연스럽고도 합당하게 감정이 절제 되고 표출 되는 모습이다.

감정은 신앙의 대적이 결코 될 수 없다. 감정이 신앙의 대적이 되는 것은 경건을 가장하려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가장은 겉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먼저 경건해져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다 자신의 더럽고 추한 실체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는 것이다.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충만한 기쁨 가운데 찬양을 하면 감격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이다. 성령이 교통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서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며 발을 씻어줄 때의 감격은 도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요컨대 성령의 인도대로 따르는 감정표현은 신앙 성숙의 통로이자 오히려 영적으로 성숙해진 증거다. (계속)

2008/12/9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인터넷 기독교 문서 사역자)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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