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은 부르심이라는 은혜(이것에 인간의 편에서 믿음이 상응한다)를 행위와 대립시킨다. 어거스틴은 선행이 은총을 앞서는 것이 아니라 뒤따른다는 사실을, 에베소서 2:8-940)과 로마서 9:7-11 상반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증명한다. 이 구절들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약속이 있는데, 이 약속들 모두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점에 행해졌다. 따라서 이들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그런 약속에 대한 의무를 갖게 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부름을 받는다는 약속은 그리스도인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도들의 상태와 관련된 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약속의 아들들(참고. 롬 9:8)임을 아는 자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상속자(롬 8:17)인 것을 부르심의 은혜 덕택으로 돌리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된 약속조차도 이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은 시점, 즉 아직 공로를 얻지 않은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권진호 – 어거스틴의 은총론 이해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기도해야 하는 기도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따를 십자가 신앙의 정신은 “아버지 뜻대로”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생활입니다. 내 뜻은 편해지고 싶고, 대접받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많이 가지고 싶고, 내 지혜, 건강, 명예, 재물을 의지하고 자랑하며 살고 싶지만, “아버지의 뜻”이 그렇지 않다면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한기채 – 마가복음, 삶으로 읽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의 거리감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아담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군지도 다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생각할 때쯤에,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교만은, 모든 판단력을 왜곡시킵니다. 절대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게 합니다. 상황을 바르게 성찰하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나’로서, ‘나 자신’을 바라보기를 거부합니다. 성경의 기준보다는 나의 기준을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설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논리라고 생각하고, 합리라고 판단하고, 정당하다고 결론을 맺습니다. 나는, 나에게만 설득되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김일환 -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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