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요 9:1-3)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을 보고 누구의 죄로 이런 불행을 겪는지 물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병자나 장애인들은 모두 죄 값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여겼다(요 9:1). 특히 선민의식이 강했던 바리새인들은 장애인뿐 아니라 어린이, 세리나 죄인, 사마리아인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발언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전형적인 차별, 혐오표현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그는 저주받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시며 맹인의 눈을 치료해주셨다. 나아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금지를 넘어 이들을 주님 대하듯 섬기라고 명하셨다(마 25:40). 구약성경은 당시 사회적 약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이방인)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하며(신 10:18-19), 신약성경도 곳곳에서 편견과 차별을 경계한다(갈 3:28, 약 2:9).
기독교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누구보다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앞장서 왔다.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초기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 박해받고 멸시당하던 우리 민중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독립의지를 일깨웠으며 학교, 특히 여학교를 세워 차별받는 여성의 교육에 힘썼고, 병원을 열어 아픈 이를 치료하였으며, 고아원과 복지시설을 세워 버림받은 이를 품었다. 지금도 기독교는 우리나라 교육과 의료, 사회복지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 10월 27일 한국교회 교인 100만명이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차별금지법을 막아달라”며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무엇 때문일까? 하나님의 법인 성경이 말하는 차별금지와 지금 시도되는 차별금지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회적 약자인 여성, 장애인, 노인, 외국인에 대해서는 이미 양성평등기본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연령차별금지법, 외국인처우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수많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고 그것도 모자라 지방자치단체별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 학생인권조례 등이 있다.
이처럼 차고 넘치는 차별금지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 없는 세상의 구현’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추진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차별 사유 속에 동성애를 지칭하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끼워 넣었다. 특히 차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에 단순한 ‘구별’과 주관적인 ‘괴롭힘’까지 포함한다.
이 법에 따르면 의대 교수가 강의실에서 전액 국비로 치료하는 에이즈 확산의 주된 통로가 게이(남성 동성애자)라는 통계자료를 제시하면 차별이 된다. 수강생이 수치심을 느낀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면, 교수가 차별이 아님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거액의 징벌배상이나 형사 제재를 받게 된다. 거기다 국가에서 변호사비용까지 대어준다고 하니 안 그래도 고소고발과 소송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묻지 마 진정이나 제소’가 남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되면 목사가 교회에서 하는 설교는 물론이고 학교 선생님들의 학생지도, 교인들의 경제활동에서 신앙양심에 따르는 동성애 비판은 자기 전 인생을 걸어야 하는 하면 모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실제 차별금지법이 시행되는 유럽과 미국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다수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성경과 우리 헌법이 선언하는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역차별’, ‘동성애 독재’를 목표로 하는 가이사의 법이다. 100만명의 교인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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