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기의 가르침을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선전한 현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가 과거에 어떠했으며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 매우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계승자들인 소위 신명기 사가들이 이스라엘의 많은 신화와 그것들과 관련된 제왕 이데올로기를 억압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왕정과 성전에 관해 남아 있는 두 개의 설명 가운데 하나(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 즉 신명기 역사)를 썼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텍스트들을 읽을 때 개혁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왕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성전의 특정한 측면에 관해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에서 이 점을 살펴볼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바로 그 관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이 기록하지 않기로 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과 그것의 종교에 관해 상당히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다른 자료들이 있으며, 우리가 고대 왕들을 소환해 내려면 이 자료들을 살펴봐야 한다.
마가레트 바커 – 하늘의 문

‘영접하고 같이 먹는다 하더라’에 사용된 헬라어는 현재형으로 예수님의 죄인과의 식사가 보여 주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계속 되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인 식사 모습임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다 하여 터부시하던 그 ‘아무나’와 기꺼이 식사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명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예와 달랐다. 예수님께는 죄인과 약한 자를 동료로 여기며 품는 것이 진정한 명예였다. 15장은 예수님이 ‘아무나’와 격의 없이 어울리신 이유를 잃은 양(3-7), 동전(8-10), 아들(11-32)의 세 비유를 통해 설명하신다. 그 비유들은 ‘잃어버린’, ‘찾은’, ‘기쁨’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된다(6, 9, 24, 32).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교류를 이어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과감히 관계를 단절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떠나 하나님께 아무런 이익이 없을 존재들인 ‘잃어버린’ 자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어 벗으로 자녀로 삼아 주신다. 이제 세 비유를 통해 ‘아무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왕인성 – 누가복음, 눈 그리고 마음으로 읽기

장로교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전형적인 공격이 있다. 머리는 뛰어난데 가슴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 없는 금욕주의자이며, 도무지 바뀔 줄 모르는 별종이고, 얼음장 같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은근한 모욕에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교회에서 질서의 반대는 거침없는 자발성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혼돈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평화보다 혼란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다(고전 14:33을 보라). 하나님은 절대로 신학과 송영(doxology)이 맞서게 하거나 머리와 가슴이 맞서게 하지 않으신다. 데이비드 갈런드(David Garland)는 이것을 귀에 쏙 들어오게 표현했다. “열정의 성령은 질서의 성령이기도 하다.”
조너선 매스터 – 개혁 신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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