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회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자료사진

올해 2월 10일 북한의 4차핵실험과 1만2천장거리 미사일발사에 대한 제재의 일환으로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중단이라는 조처에 대해 북한은 11일 개성공단 폐쇄 군사지역 선포를 하여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북한 주민의 생존의 기본권과 사회적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지난 2월 19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의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북한 인권과 안보의 결합' 세미나에선 북 정권 변화를 위한 방법론들이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미 국무부의 전·현직 고위 간부들과 마이클 커비 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장 등 인권 관계자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시간 동안 한목소리를 냈다. 이날 세미나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발표 2주년에 맞춰 열렸다. 북한 인권은 그 자체가 궁극적 가치로서 "주민이 외부 실상 알게... 드라마든 걸그룹 노래든 유입시키자"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개성공단이 중단된 상태에서 한국교회는 북한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여 우리의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일의 통일에는 서독의 지속적 동방정책, 동독 라이프지히 니콜라이교회의 월요 기도회, 동독 인권 상황을 위한 서독교회의 교량적 역할: 정치범 돈 주고 데려옴(Freikauf), 갑자기 다가온 베를린 장벽 붕괴 사건을 놓치지 않고 통일 외교를 통해 동서독 통일로 연결 등이 있었다. 한국교회는 서독의 동독주민의 인권 정책을 배우고 오늘날 한반도 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I. 서독의 동방정책 - 독일 통일은 결코 하루 아침에 온 것 아니다

동서독간 경제교류는 양독간 교류의 촉매역할을 하였다. 동서독은 교역에 관한 베를린협정(1951)을 맺었다. 그리하여 서베를린을 포함하여 양독간의 교역을 국가 간의 교역이 아니라 "지역 간의 교역"으로 취급하여 서로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독의 무역은 비교적 수지균형을 이루면서 발전되었다. 그러나 동독의 서독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현저히 높았다. 양독의 교역은 1951년 첫 교역이 시작될 때부터 환율을 1:4의 비율로 유지하여 왔다. 첫 교역의 해에 서독은 1천2백만 마르크의 상품을 팔았고, 1천5백만 마르크의 동독제품을 사들였다. 이 수치는 그 후 점점 불어나 1988년에는 수출 75억 마르크, 수입 71억 마르크 수준까지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호네커-슈미트 총리회담(1981.12) 및 호네커-콜 총리회담(1983.9)이 이루어져 교류증진을 위한 여러 협정을 맺음으로써 더욱 교류를 증진시켰다. 1984년 4월 서독의회 대표단이 동독을 방문함으로써 국회, 정당 간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독의 동방정책 -"통일"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던 "1국가 2체제 정책"- 은 양독의 교류를 줄기차게 증대함으로써 동독사회 내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민족동질성 유지에 기여했다.

II. 독일 통일에 있어서 독일교회의 역할: 동독 라이프지히 니콜라이교회의 월요 기도회

1989년 동독의 민주화 물결 가운데서 동독민중의 힘을 결집시킨 구심체는 루터파 개신교에 속한 라이프지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이었다. 이 교회는 매주 월요일 모인 "평화기도회" 8년 만에 동독개혁의 불을 당긴 것이다. 담임목사 크리스쳔 퓨에라가 시작한 이 월요 평화기도회는 동서독 땅에 핵이 새로 배치되어 사회적 불안이 컸던 해 1982년 초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매주 월요일 개최되었다. 처음 몇 년 간은 5십 명에서 1-2백 명 참가자로 인권, 환경, 평화 등의 주제로 기도회를 가졌다.

1989년 1월 17일 동독 공산당이 주최한 관제집회 도중 평화기도회 교인들이 "단일 정당이 베푸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시위를 벌이는 우발사태가 발생한다. 이 사태로 연루자 1백 20명이 체포되고 이들은 14일 만에 석방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월요기도회 참석자는 몇천 명으로 늘어난다. 공안당국은 교회를 포위하고 검문검색을 강화한다. 그러나 9월에 접어들어 몇만 명으로 늘어난다. 9월 11일에는 2만 5천여 명이 모였고 기도회 후에 처음으로 침묵 시가행진을 벌인다.

1989년 10월 9일 월요 기도회 후 10만 명의 개혁요구 촛불 침묵행진은 드레스덴, 동베를린 등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마침내 호네커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월요예배 참가자들은 월요예배가 끝난 오후 5시경부터 "우리는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떠날 것이다.""에곤은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시내중심부에서 평화로운 시위를 벌였다.

라이프지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당과 더불어 베를린의 게세마네 교회당은 동독 내 개혁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게세마네 교회당에서는 매주 월요일 6시에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교회당 건물 앞에는 "깨어나라 그리고 기도하라,""부당한 구속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출입구 앞에도 당시 동독 유일한 재야단체인 <신 광장>(Neues Forum)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서명이 있었다. 이 게세마네 교회당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부시책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월요기도회 후에는 수십 명에서 2백 명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와 개방화를 위한 평화적 시위를 해왔다. 동독의 구속자 석방을 위한 월요기도회는 동독 공산정권의 어두움을 밝히는 "자유의 빛"이 되었다. 이처럼 동독교회는 동독 내의 반 정부집단인 <신 광장>과 더불어 민주화와 개방화를 요구하는 대정부 압력의 중심지이며 동독 내 민주화와 시위의 진원지가 되었다.

III. 동독 인권 상황을 위한 서독교회의 교량적 역할: 정치범 돈 주고 데려옴(Freikauf)

서독교회는 동독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동독과 서독 정부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독일이 동서로 나뉜 뒤 서독 개신교연합회는 동독에 수감돼 있던 성직자 150여 명에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이들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서독 개신교 연합회는 동독 교회 쪽에 사람을 넣어 성직자를 억류하는 것은 동독 사회의 인상(印象)을 나쁘게 만들 뿐이라고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서독 개신교연합회는 1962년 트럭 석 대분 비료,·옥수수, 석탄을 넘겨주고 성직자들을 데려왔다. 동·서독 사이에 처음으로 '몸값 거래'가 성사되자 이듬해 1963년에는 서독 정부가 나섰다. 부모는 서독에 있는데도 동독에 따로 남겨진 어린이 20명과 정치범 8명이 서독으로 넘어왔고, 현금 32만 마르크(당시 1억7000만 원)가 지불됐다.

이때부터 서독 정부는 세세한 실무를 개신교연합회 간부들에게 맡겼다. 서독 측이 석방 대상자 명단을 내놓으면 동독 측이 심사한 뒤 확정된 명단을 알려왔다. 몸값은 개인에 따라 값을 달리 정하지 않고 총액으로 매겼다. 서독 정부는 동독 교회·법원·검찰을 통해 모은 정보와 주민 탄원서를 근거로 석방 요구자 목록을 만들었다. 주민 탄원서 및 석방 요구자 목록 작성에 있어서 서독정부는 동독 주민들에게 서독사회가 자신들의 삶과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확신을 느끼게 해주었다. 동독 정부는 일반 형사범과 잡범까지 끼워 넣어 돈을 더 많이 받아내지만 서독 정부는 이들을 솎아내 몸값 총액에서 뺐다.

서독 정부는 1962년부터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7년 동안 동독 정치범 33755명과 가족 25만여 명을 데려왔다. 몸값으로 34억6400만 마르크가 들었다. 통독 당시 환율로 1조8400억 원이다. 이 정치범 석방 거래를 '돈 주고 자유를 산다'는 뜻에서 '프라이카우프(Freikauf)'라고 했다. 동독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한 서독 정부의 이러한 개선 요구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은 서독 정부를 신뢰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의 상황이 다가왔을 때 주민 투표에서 서슴치 않고 서독과 합병하겠다고 찬성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IV. 갑자기 다가온 통일: 예기치 않은 사건을 결정적 기회를 붙잡은 서독 정부

독일의 통일은 서독 정부나 국민 누구도 전혀 예기치 않게 다가왔다. 독일 통일을 향한 극적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은 동독 경찰이 민주화 시민운동에 더 이상 제재를 가하지 못하게 된 시점인 1989년 11월 9일로 본다. 그것은 1961년 8월에 설치된 베를린 장벽이 28년만에 무너지게된 시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수수께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1989년 9월에 동독 라이프지히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민주화 촛불시위가 10월 9일 동독의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로 변했을 때 중국식 해결법을 결정한 호네커가 내린 발포명령이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11월 9일 동독 베를린에서 아무런 상부의 명령을 받지 않은 채 동독의 장교들이 밤에 물밀듯 밀어닥쳐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시위군중들이 장벽을 넘어가도록 국경을 열어주자는 합의를 본 것이다. 그 전환 후 만 1년 만에 공식적으로 통일은 1990년 10월 3일 이루어졌다. 시민혁명으로 촉발된 동독의 변화에 서독 정부는 민첩하고 지혜롭게 대처함으로써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통일이라는 기적을 이루어내었다.

/글=기독교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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