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 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11일 서울 종교교회에서 열린 생명신학연구소(소장 김명용 박사) '제32차 전문위원세미나'에서 발표한 대전신학대학교 최성수 박사의 발제문을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최성수 박사ㅣ대전신학대학교

 인간을 보는 눈으로서 시대정신은 적합한 매체를 요구한다. 21세기는 영상문화시대다. 영상문화시대의 인간 이해는 영상매체에 의존한다. 영상매체인 영화는 인간을 인식하는 수단이면서 인식의 주체이며 또한 인간 이해를 위한 재료다. 심지어 영화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감독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적 특성에 고유한 자신만의 세계에서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새로운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전통적인 인간 이해를 확장하기도 하고 또한 갈등하기도 한다. 적합한 영화적 인간 이해에 인간의 미래가 있다. 따라서 영상시대의 기독교 인간학을 위해 특히 영화적인 인간 이해 및 인간 이해 방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이유는 충분하다.

■ 들어가면서
칸트(Immanuel Kant)는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를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 철학의 기본문제들을 네 가지 질문으로 요약하였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앞의 세 질문을 통해 칸트가 밝히려 했던 것은 이성을 통한 인식, 행위, 그리고 판단의 본질이다. 이것은 그의 비판 철학의 3부작(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각각에 해당한다. 그리고 세 연구를 통해 마지막 네 번째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비판철학을 기획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인간학을 위한 칸트의 비판철학적인 작업은 인간 이해를 위해선 사유의 매체로서 이성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인간 이해는 무엇을 매개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학은 인간을 관찰하고, 공통점 혹은 패턴과 유형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이성적인 추리를 바탕으로 통합하여 서술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만을 다루지 않고(철학적),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환경과의 관계에서 삶의 다양한 행태들을 현상적으로 관찰 기술하고(문화인류학적) 또 인간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을 가진 인간을 탐색하며(과학적) 인간을 연구한다.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혹은 종교적인 텍스트에 근거해서 인간을 이해하기도 한다(종교적). 간단히 말해서 인간을 방법적으로 이해한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상술해보자.

인간학적인 성찰의 방식과 소재는 연구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본질에 두는 연구는 주로 이성 중심의 철학에서 이뤄졌다. 근대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는 경향이지만,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적인 성과들을 철학적 성찰의 기반으로 삼는 시도가 많아졌다. 이에 비해 문화인류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재료와 방식은 한결같이 인간의 생산물과 기록물 그리고 인간의 각종 행태에 대한 관찰 등이었다.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여 종합함으로써 인간을 전형에 따라 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인간 이해의 역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지만, 인간을 관찰하는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 이해의 스펙트럼은 더욱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생물학이 인간학 연구에 자극을 주었다면, 최근에 가장 주목을 받고 또 인간학 연구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연구 결과는 주로 IT 분야와 뇌 신경생리학에서 나오고 있다. 양자는 결합하여 인공지능 분야에서 괄목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뇌 신경생리학은 흔히 뇌 과학으로 통용되는데, 뇌 활동에 대한 연구는 단지 물질적이고 육체를 가진 인간 이해에서 새로운 국면을 제시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본질에 대한 그간의 이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물론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환원주의적인 추리로 인간 이해에 접근하는 뇌 연구는 인간의 의식과 사고 그리고 행동이 뇌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과학적으로 발견함으로써 인간 이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학문 분과의 세분화와 함께 그리고 거대담론이 해체되는 시기에 총체적인 인간 이해의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해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 이뤄지든 인간 이해의 목적은 인간을 규정하기보다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 유익을 주려는 목적을 갖는다. 또한 이를 매개로 인간이 사회와 세계와 하나님을 아는 일에도 크게 기여한다.

인간을 보는 방식은 다양하다. 여기서 매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별히 과학적이길 원하는 노력은 각각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다양한 방식들을 개발해왔다. 인간학 연구에서 접하게 되는 철학적 인간학, 과학적 인간학, 예술적 인간학, 심리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학 등은 인간을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나타난 결과다. 인간을 지각하는 방식의 변화는 문명의 역사와 병행하는데,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개념에서 이미지로의 획기적인 변화는 영상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그래서 현대를 영상(이미지)시대라고 한다.

■ 영상시대의 인간론-영화적 인간 이해
"현실 속 사람들은 삶이 영화 같기를 바라고, 영화 속 인물들은 영화가 삶과 같기를 희망한다."(<카이로의 붉은 장미>(우디 앨런, 1985) 중에서)

한국 기독교계에서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로 잘 알려져 있고, 특히 영화예술의 특징에 천착했던 감독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은 영화의 목적을 "시로서도, 철학으로도, 극작술에 의해서도 포착되지 않는 심정 중의 심정에 도달"하는 것에 두었다. 이로써 영화적 인간 이해의 독특성을 환기하였는데, 이런 독특성은 기계장치(시청각 영상기술) 때문에 발생한다. '심정 중의 심정'이란 표현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음의 인용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인쇄술의 발견은 인간의 얼굴을 점차로 읽을 수 없게 만들었다. 종이에 읽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얼굴 표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은 쇠퇴했다. .... 지금 새로운 발명품, 새로운 기계가 인간의 관심을 가시적 문화로 돌려놓고, 그들에게 새로운 얼굴을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계는 영화 촬영용 카메라이다. 인쇄기처럼 이 기계는 인간 정신의 산물을 증식하여 배포하는 기술적 장치이다. 그것이 인간의 문화에 끼친 영향은 인쇄기에 못지않다."

영화이론의 역사, 특히 1920년대 영화비평과 영화미학의 역사에서 매우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하며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헝가리 출신의 벨라 발라즈(Bela Balazs)가 쓴 글이다. 유성영화 시대에 무성영화의 시각적인 표현능력을 회복하기를 원했던 그는 영화의 특징을 인간 얼굴의 발견에서 찾았다. 영화영상의 표현가능성에 천착했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을 넘어 그는 영상의 심층적인 면을 이론적으로 탐구했다. 1924년에 출판된 "가시적 인간 혹은 영화문화"에서 인상론(Physiognomik)에 근거한 주장을 펼쳤는데, 영상의 중요성은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인 경험"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얼굴과 얼굴 표정에 나타나는 것을 "즉시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영적인 경험"으로 본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옷을 입은 영혼"을 시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영화를 통해 "[내적인]인간은 다시 가시적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앞서 인용된 브레송과 발라즈의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영상시대의 인간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을 확인해준다.

영화가 상상의 세계로 가는 창에 비유되는 현실에서 '영화적 인간 이해'를 말할 때, 부딪히는 문제는 영화가 허구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 속 인간, 곧 허구 세계의 인간을 인간 이해의 모델로 삼아도 되는 것인가? 플라톤의 말을 빌린다면, 영화 속 인간은 단지 동굴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까?

영화적 인간 이해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를 대상으로 삼아 인간을 이해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작업은 스크린 상에 나타난 이미지와 관련해서 인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묻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스스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모종의 인간 이해를 전제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캐릭터로 등장하는 인간은 각종 인간학적인 이해의 결과이며, 관객과의 관계에서 흔히 도펠갱어(Doppelganger)로 기능한다. 관객의 또 다른 존재로 지각된다. 그래서 영화적 인간 이해는 먼저 관객의 영화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영화적인 표현을 가능케 한 인간 이해와 관련해서 영화적인 지각 방식을 묻는다. 또한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볼 때 작동하는 신경세포인 거울 뉴런의 발견은 보는 것과 하는 것(보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었다. 다시 말해서 보는 인간이 행동하는(보이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의식을 일으킴으로써 영화 속 인간과 관객의 동일성이 성립한다. 영화 속 인간은 그림자가 아니라 관객 자신이 된다. 이렇게 해서 영화적 인간 이해는 다양한 캐릭터의 인간을 매개로 인간의 본질을 묻고(영화적 인간론), 영상인류학적인 관심을 추구하며(visual anthropology),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된(과학적, 철학적, 예술적, 종교적) 인간 이해를 비평적으로 성찰한다.

영화는 상상의 세계로 이끌지만 현실로 가는 창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적 인간 이해는 그림자로부터 빛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간의 현실을 관찰함으로써 인간의 본질 이해에 이르려고 하듯이, 곧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린다면, 현존재 분석을 통해 존재 인식에 이르려고 하듯이, 영화에 나타나는 인간을 현상학적으로 관찰함으로써 현실의 인간을 보고 또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묻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인간학적 탐구를 실행한다.

영화적 인간 이해의 특징은 영화에 대한 이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는 이미지를 통해 사유하는 사람들의 작품으로서 보이지 않는 현실을 시청각 매체를 통해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이로써 영화는 새로운 현실을 구성한다. 또한 이미지로 재현하면서 익숙하게 보는 현실을 다시 볼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각 방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보려는 시도다. 브레송은 영화를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라고 말했다. 달리 말해서 연극이나 사진과 달리 영화는 각종 시청각 매체를 통해 은폐된 세계, 과거 및 미래의 세계, 상상의 세계, 이념의 세계, 문자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 매체를 통한 세계는 가능성을 공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현실 구성을 주도한다. 영화 속에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현실을 왜곡 혹은 변형하는 영상을 통해 기존의 현실을 낯설게 여겨지게 하는데,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주목하여 보게 하여 그동안 간과했던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을 이끈다. 이로써 사실에 대한 재인식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 되면 영화는 더 이상 단지 보거나 보여주는 일만이 아니라 인식 행위를 수행한다. 영화적 인식론이라는 말이 가능한 이유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일본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한 여성 스타의 죽음과 관련해서 글을 쓰면서 사실과 영화적인 허상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넘어서는 것은 허상뿐이다. 위대한 허상만이 현실을 넘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으므로." 배우는 죽어 사라져도, 스타 이미지는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21세기 영상문화시대에서 허상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지는 않는다. <계속>

글ㅣ대전신학대학교 최성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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