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우 (주)도움과 나눔 대표   ©기독경영연구원

세월호의 침몰과 수습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슬프다. 일자리가 보람 있는 책임이 아니라 밥벌이가 되어버린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선장과 선원들은 위기 상항에서 책임을 던져버렸다. 책임감이 그들의 몸 속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을 보았고, 정치인들의 무개념을 보았다. 모두가 왜 그 엄중한 자리에 있는지를 모른다.

타락 이전에도 인류에게는 일이 있었다. 일, 쉼, 결혼은 원죄 이전에 인간이 하나님과 사귀는 방식이었다.

책임감은 은총의 일부이다. 우리 사회는 일 자체에서 보람을 구하지 않고, 일을 통해서 오는 권력, 돈, 여유에 집착하는 사회가 되었다. 노동의 심각한 타락을 우리는 만나고 있다.

구약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자들이 나타난다. 민수기 32장의 이야기이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요단강을 앞에 두고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이 모세와 제사장 그리고 각 지파들의 족장들에게 자신들은 요단강 동편에 남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모세는 크게 노한다. 모세는 갓, 르우벤 자손들에게 다른 지파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고 돌아와 요단강 동편 땅에 정착하라고 말한다. 그리하면 '너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앞에 죄가 없을 것이다(민 32:22)'라고 말한다. '죄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키'라는 용어인데 영어로는 'pure', 'innocent', 'free of obligation', 'clear'등으로 사용되었다. 민수기 32장에 사용된 나키는 때가 묻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역사적 책임을 다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소극적인 순결이 아니라 '적극적 순결'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을 판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죄한 피(담 나키)'를 흘린 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순결하다. 적극적으로 순결하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예수님 자신의 '적극적 거룩과 순결'을 보여주신다.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한 예언들을 많이 접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나의 삶의 길(드로모스)과 사명(디아코니아)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행 20:24. 사역)'고 말했다. 바울의 삶도 자신의 구주를 따라 적극적으로 순결하다. 예수님은 책임을 지시는 분이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책임을 지우시는 분이다. 그 책임이 교회의 유기적 몸된 한 원리이다. 그래서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이다.

우리 사회가 이 적극적 순결을 잃어버렸다. 어린 학생들이 세상을 도울 희망으로 가슴 뛰지 않고 단지 의대에 가고, 공무원이 되고, 공기업에 취업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생존에 대한 욕구와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로 바뀌어가는 징후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이 사회에 태풍 같이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저마다 가슴 속에 불꽃을 가지고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 수 십 년 우리를 지배한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살피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복을 구하며 살아왔는지 물어야 한다.

기업가들의 책임은 엄중하다. 기업을 수익성 있게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하늘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기업 구성원들의 삶에 '의미'로 가득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데까지 가야 한다. 무릇 사람은 온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호흡해야 살아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 엄중한 시기에 경영자들은 강단에서 목숨을 걸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보다 더 칼끝같이 깨어있어야 한다.

출처: 기독경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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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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