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현존하는 최고의 기독교 박해국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북한선교는 대부분 북한정권의 통제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장소(중국을 비롯한 제3국, 북한 내 외딴 곳)에서 통제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시간(깊은 밤), 통제가 작동하기 어려운 방법(비밀모임)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선교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도 기근과 경제 붕괴로 정권의 통제기능이 마비된 시기인 1990년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만을 공략하는 선교는 소수에 대한 제한적 사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또한 북한의 통제가 사라지기 위하여 북한체제의 붕괴만을 기다릴 수도 없다. 건재한 북한의 체제와 그 종교정책을 주시하며, 오늘도 북한의 통제하에 하루를 살아가며 영적, 육적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작은 변화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그 틈을 공략하는 것이 선교단체의 전략이다. 북한의 종교정책과 더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 분야는 통일운동 분야다. 북한의 종교정책은 최근 한국교계에 불고 있는 통일운동과 기도운동의 목적과 기도제목이자 동시에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북한의 종교정책은 북한 선교사, 기독통일운동가, 그리고 북한과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성도에게 사실상 가장 중요한 화두라 할 수 있다. 이에 북한정권의 종교정책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전망하려 한다.

북한 정권의 종교정책 변화

북한정권은 기독교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강조한다. 지금도 신청만 하면 북한 봉수교회를 방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정권에 반하는 모습이 발견되면 그 즉시 강한 제제를 가한다.

북한 정권과 기독교계의 대립은 정권 수립기로부터 시작된다. 해방 당시 3.8선 이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은 기독교 조직이었다. 한반도 최초의 민주주의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등의 조직은 소련군정과 김일성 모두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는데, 이 두 정당은 모두 기독교인이 주축을 이룬 정당이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행사를 정부 차원의 단일행사로 거행하려던 소련군정과 교회 주도의 자체 행사를 계획한 개신교계의 갈등은 3.1절 행사장에서 김일성에 대한 테러로 분출되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인민위원회의 선거가 주일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기독교계의 극렬한 반대 운동과 선거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김일성 세력의 핍박은 북한지역의 개신교계의 몰락과 북한정권의 반종교 정책이 공식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도 기독교인들의 친이승만-친미적 성향과 그 이후로 발발한 6.25전쟁을 통해 북한정권은 초창기부터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강한 적대정책을 펴게 된다. 이후로 1950년대 후반까지 북한의 종교정책을 보여주는 공식적인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해방-6.25의 흐름과 이후로 확인된 단편적 증언들을 통해 6.25 이후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대 말 주민통제시스템이 강화되며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공식적인 문서들을 통해 북한정권의 종교에 대한 입장이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대표적인 반종교 선전 자료로는 1959년에 발행된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정하철, 로동당출판사)를 비롯한 6종의 반종교 논문집, 1963년에 발행된 '사회주의와 종교'(임훈, '근로자' 8월호),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침략도구로서의 종교'(신영하, '근로자' 3월호) 등이다. 정하철의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에서는 저술목적을 "종교의 간판을 이용하여 음흉하게 반혁명 음모를 조작하는 원쑤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66년 4월부터 1967년 3월에 이루어진 주민재등록사업의 결과를 토대로 1970년 9월에 북한주민 전체가 51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이 분류에 따르면 기독교인(42), 불교신자(43), 유학자(45)는 복잡계층 중 '사회도덕면에서 과오를 범한 계층'으로 구분된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대외 활동 확장

칠골교회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북조선기독교연맹은 1974년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는 북한정권이 공식적으로는 기독교를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등장은 북한정권의 기독교에 반대하던 입장과 모순된 현상인데도 이 단체는 대외적 활동을 확장해 나간다. 1974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 의사를 타진했으며, 1976년에는 기독교평화회의(CPC)에 가입하였다. 19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해외동포들과 교류를 가졌고, 1983년에는 공식적으로 성경과 찬송가가 출간되었다. 이후로 1985년 WCC대표단의 방북을 비롯하여 다수의 기독교 인사들이 조선기독교도연맹과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기독교 행사에 참석하는 북한 인사들은 북한정권은 전혀 반기독교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북한정권의 공식적 태도 변화가 극명히 드러난 것은 1992년 발간된 '현대 조선말 대사전'에서였다. 1981년판 '조선말대사전'과 비교했을 때 종교 관련 정의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종교를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1981)에서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 신앙 또는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1992)으로, 선교사는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예수교를 선전하여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파견하는 종교의 탈을 쓴 침략의 압잡이'(1981)에서 '기독교를 보급 선전할 사명을 띠고 다른 나라에 파견한 사람'(1992)이라고 바뀌었다.

1990년대 후반 대북지원사업 활발

1990년대 후반 남북교류의 물결 속에서 남한교회와 전세계 기독교계는 많은 대북지원사업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외부의 기독교 자원 활용을 위해 북한정권은 대외적으로 북한의 종교자유를 강조하였으며, 기존 대외기독교 연락채널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1999년 조선기독교도연맹→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명칭 변경, 조그련)의 역할이 증대된 것은 물론이고, 정권의 다른 파트도 해외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단체와의 접촉을 하게 되어 북한정권과 기독교인들의 접촉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그 중 최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평양과기대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역으로서 북한정권의 필요와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맞아떨어져 맺은 열매라 할 수 있다. 평양과기대는 최근 의과대학설립, 농업분야 국제공동연구 프로젝트 착수 등 북한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북한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그 밖에도 봉사를 비롯하여 여행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 중에도 기독교인의 비중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교의 마음으로 북한에서 사업, 지원사역을 시도하고 있다.

체제 위협 않는 선에서 기독교인 비전트립 허용

CNN은 영국, 미국, 중국 등에 본사를 두고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북한여행상품을 판매하는 5개의 여행사를 소개했는데, 본 연구소가 확인한 결과 5개 여행사 모두가 기독교인들을 고려한 투어상품을 진행한 경험이 있으며, 이 중 2개 여행사는 2월 21일 현재도 신청만 하면 평일 봉수교회 방문 등의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북한당국도 체제의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의 봉사 혹은 비전트립을 허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부정적 뉴스들도 들려온다. 지난달 2월 초순에 있었던 평양과기대 미국인 부부교수가 비자발급을 거부당한 사건, 여행 중에 구금된 호주선교사 존 쇼트의 사건, 관광 인솔자로 라선을 방문했던 케네스 배의 장기 억류 등이 그것이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이들의 종교적 동기를 인지했으나 북한 정권이 그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나 이들의 행동 중 북한정권에 반하는 모습이 발견된 즉시 그것이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정권에 의한 강한 제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묵인하고 있으나 정권에 방해가 될 경우 가차없이 반응하는 북한정권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북한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오랫동안 이어져오며 체질화되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기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정권은 기독교와의 갈등 속에서 탄생하여 기독교와 모순되는 사상과 체제 속에 발전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북한정권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를 인정하고 다소나마 전향적으로 변해왔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틈을 공략하여 신앙인으로서 북한의 종교인들과 공식적 접촉을 이어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북한 주민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한다. 어떤 이들은 신앙으로서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주민을 접촉하며 기도한다. 이는 현존의 선교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북한 땅에 드러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북한정권의 종교정책 변화는 어디까지나 대외적, 공식적 변화일 뿐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신이 보낸 사람'에서 보여주듯, 북한의 주민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종교집회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 된다. 성도들은 극심한 감시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와 같은 체재와 틀에서 앞으로 더 전향적인 종교정책의 변화가 나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앙의 자유와 국민에 대한 이권이 원인이 아니라 외교적, 혹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종교정책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종교정책의 변화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변화이다. 성경의 내용을 믿고 고백하고, 교회를 이루어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신앙과 종교행위를 이유로 처벌을 받지는 않는 정도까지의 변화이다.

체제와 틀의 변화 없는 종교정책만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북한의 종교정책에 변화가 있으려면 체제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사회복음의 실현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변화의 불씨들이 살아나기를, 지금 많은 외부의 크리스천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넓은 의미의 선교가 더욱 확장되어 변화의 불씨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오픈도어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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