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자유는 모든 인간이 희구하는 가치이자, 명제이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위한 투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는 중세의 암흑기를 이성으로 빛으로 비추었다. 여기에 종교 개혁은 진리의 빛을 더하였다. 진리와 이성의 빛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에 대한 갈망을 고조시켰고, 그로 인해 노예 해방과 식민지 해방의 결실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단 2:20-21).
노예 해방과 식민지 해방은 하나님의 손이 개입하신 역사의 주관이며, 이로써 얻게된 인간의 자유는 물리적 자유이다.
그렇다면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이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월절, 해방의 아침을 맞이한다.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의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자유이다. 몸은 자유를 얻었으나 삶이 노예 근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노예 생활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석달후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다.
계명과 더불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선언이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이것은 상황의 자유와 다른 차원의 '존재의 자유'이다.
하나님이 떠난 상태에서 얻은 '상황의 자유'는 무의미하며, 외적 고통은 없을지언정 영혼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존재의 자유를 얻은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하다.
요셉을 보라! 그는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인으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렸다. 상황의 자유를 모두 박탈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리하여 요셉은 상황의 억압에서 자유자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그는 비록 노예가 되어 상황의 자유는 없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존재의 자유를 향유하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한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가 아닌가!

세상은 상황의 자유를 추구한다.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가고,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간다. 산업혁명을 필두로 과학의 발전, 기술의 진보는 상황의 자유를 확대하였다. 상황의 자유는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획득이 가능한 영역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상황의 자유'를 추구한다.
신분과 직위의 상승, 더 좋은 집, 고급 자동차, 여가 생활, 교회 안에서도 직분의 상승에 목말라 한다.
이 시대의 우상은 "생활 수준의 향상" "럭셔리 문화"이라는 통찰은 매우 적절하다.
럭셔리 문화의 심층에는 상황의 자유를 향한 목마름이 내재하며, 이는 일시적인 해갈은 주지만,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의 목마름이다.

저 깊은 곳의 자유를 향한 목마름은 사실 하나님, 존재를 향한 목마름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갈망한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상황의 자유에 목말라하는 것은 '수족관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가 목말라 발버둥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비로소 영혼의 자유, 안식을 경험한다.
그 때 주어지는 고요함과 신뢰가 진정한 자유이며, 존재의 자유이다.
하나님은 이 자유를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나에게 돌아와 안식하는 것이 너의 구원이다. 잠잠하여 나를 신뢰하는 것이 너의 능력이다"(사 30:1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다리'이다(bridge of salvation).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밖에서 상황의 자유만을 갈구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진정한 자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존재의 자유에 이르게하는 하늘의 사닥다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와 율법으로부터 자유이다.

갈라디아서는 그 자유를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의 헌장으로 불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

이 아침, 거룩한 자유의 헌장 앞에 다시 한번 나의 존재를 밝히 선언한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자유자이다! 결코 죄와 율법의 종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종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율법)을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종이다.
즉,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우리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담안에서 죄를 짓고 타락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독립된 자아.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이 일을 어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요, 속임당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아담 안에서(롬 5:19), 개인의 시간으로 보면 태어날 때부터(시 51:5), 하나님을 떠난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그리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죽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 위해 대신 죽게 하셨다.
죄인인 우리에 대한 심판이 아들에게 대신 임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들이 죽을 때에 죄인이 우리도 함께 죽었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 독립된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갈 2: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로 건너갈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건너 갈 수 있는 다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연결되고, 연합되는 구원의 다리인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 자,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신 자이다.
이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더이상 내 힘으로 선한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유효하다(6절).
여전히 실체로 남아 있는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사는 것.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여 머물러 있을 때 존재의 자유자로 살게 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자유를 향유하며 잘 살아왔었다(7절;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그런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할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구원의 효력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율법 안에' 있음은 내가 무엇인가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해야 한다는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하신 명령이었다(창 17:10-1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복음을 듣고 믿어 의롭게 되었다(창 15:6, 갈 3:8).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 상당시간이 경과한 다음, 하나님은 할례를 하라고 명하셨다.
이는 그가 선택받은 백성이요, 구원하셨다는 표지로 주신 것이지, 구원의 조건이나 구원의 효력으로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즉, 할례는 복음에 기초한 믿음의 표지인 것이며, 그러므로 복음을 알지 못한 이들에게 할례는 아무 의미도, 아무 효력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이자, 구원의 효력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도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서지 못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적 표지를 구원의 징표로 생각한다. 현대적 의미의 할례이다.
대표적으로 직분을 받거나, 봉사를 하거나, 헌신을 하면, 그것이 자신의 구원을 보증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사귐의 실제도 없으면서, '나는 집사니까 당연히 구원받았겠지'라는 착각속에서 사는 것이 그 일례이다.

이렇게 믿고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진리가 아니다(8절).
사람에게서 나온 가르침이며, 조건이며, 이것이 성찰없이 지속되면 전통이 되고 관행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에게서 나온 전통과 관행이 진리를 대체하고 만다. 그것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영향력이 파다하다(9절).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자유를 팽개치는 것이며, 다시 자기 힘으로 사는 율법의 종이 되고 만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려고 죽으신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며, 그의 죽으심을 멸시하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아침, 나는 어디에 속해서 신앙을 하고 있는 가 다시 묻게 된다.
이는 자유의 성찰이다. 나는 과연 자유가 있는가,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지 않는가!

그렇다.
진리 안에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자유자이다.
그러나 내게서 나온 생각, 진리 밖에 있으면, 즉시 자유를 상실하고 죄의식와 죄책감에 매이는 율법의 종이 되고 만다.

이 아침, 무시로 내게 잦아드는 율법 안에서의 믿음이 가시채를 밟듯이 나를 괴롭힌다.
나를 의식하고, 나를 주목하고, 상황에 즉시 반응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내 존재를 온통 삼켜버리고 만다. 그에 대한 심판은 자명하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

바울은 사람에게 나온 생각과 교훈을 즉시 베어버리라고 말한다.
스스로 베어버려 고자가 되라고 엄중히 고한다.
내가 베어버려야 할 것, 고자가 될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육신의 생각이다.

이스라엘 아합 왕은 아람과 전쟁에서, 항복하는 벤하닷을 '스스로 생각'으로 후대하였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네가 '스스로 결정'했으니 네가 '스스로 당하리라'고 심판하신다(왕상 20:40).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스스로의 생각' 이 둘은 생과 사를 결정짓는 대립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과 율법 안에서 사는 대립이기도 하다.

이 아침, 다시 한번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진리로 살기를 고백한다.
진리 아닌 권면에는 마음도 눈도 돌리지 않고, 오직 진리에 착념하며 살기를 고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존재의 자유를 향유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자유자로 살기를 소원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내게서 나오는 생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다시 율법의 종노릇 하는 저를 봅니다.

오늘 아침에도 내게서 나온 생각, 이전의 습관, 신앙의 관행에 붙잡혀 스스로 매여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에서 나오지 않는 권면은 언제든지 적은 누룩이 되어 저의 온 존재를 삼키고 괴롭힙니다.

그리스도와 나를 분리시키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하는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의 자유를 자각하며,
오늘 주신 모든 상황에서 넉넉히 승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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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