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을 통해 기록된 성경, 신약의 바울서신은 13개이다. 그 중 갈라디아서는 비진리에 대한 진리의 변증서로 불린다. 다른 서신에서 나타나는 위로와 돌봄, 격려와 지지는 거의 없고 비진리를 따르는 이들을 경고하고 책망하고, 진리로 돌이킬 것을 촉구한다.

갈라디아서에서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은 '은혜의 복음'과 '율법의 행위'간의 대립니다.
어찌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듣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쉽게 '율법의 행위'에 미혹되어 비진리로 믿는가!
기쁜 소식, 자유의 복음을 듣고도, 율법을 좇아 스스로 얽메이고, 스스로 괴로움을 더하는가!

이 탄식은 갈라디아 교인들뿐 아니라, 당시 다른 교회는 물론 오늘 우리들도 경험하는 보편적인 신앙의 현실이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교회의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편만한 신앙의 현실이다.

'반짝 은혜'란 말이 있다. 은혜받고, 때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은 은혜와 무관한 채, 복음의 진리와 상관없는듯 이전의 모습대로, 신앙의 관행대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것을 보며 스스로 놀라고, 체념과 자괴감이 시달리다가 '다 그런거지, 적당히 믿지'라고 하는 자조섞인 허무속에서 타협하고 만다.

이는 개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사역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또한 늘 겪어왔던 경험이었다.
하지만 무지에서 깨어난 지금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다.
'비진리의 견고한 진이 이처럼 강력하구나!'라고 하면서 영적인 도전을 받고, 경각심을 얻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비진리의 견고한 진 앞에서 좌절과 무력감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오직 보혈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지성소로 나아간다.
비진리의 폭풍으로 진리가 거의 휩쓸려가는 참담한 상황에서 희미한 빛이 임한다.
그리고 내 영혼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평안을 회복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거저 받아들이면 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받아들여 향유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복음과 대치되는 율법의 행위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며, 그 결과는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귀착된다.
율법주의는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보상과 처벌의 원리"를 따른다.
내가 잘 믿으면 '보상'받고, 내가 잘 믿지 못하면 '처벌'을 감수한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아무도 존재가 선하지 않기 때문에(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결코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없다.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데 어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롬 7:18).
그러나 율법주의는 스스로 속인다.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에 대한 보상을 추구한다.

보상에 대한 기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이는 인간이 종교를 갖게 하는 뿌리깊은 본성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깊이 박혀 있는 종교성인 것이다.
복음은 보상과 처벌의 종교성 안에 심겨진다.
그러나 보상과 처벌의 본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본성에 첨가된 복음은 한낱 별미에 불과하다.

진리에 관한 인간의 본성은 '첨가'하기 보다 '제거'하기가 더 어렵다.
스텐리 죤스는 인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인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결코 '제거'하는 민족이 아닌 것을 알았다.
이들은 이전에 믿는 신들에다 또다른 진리 하나를 '첨가'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들에게 복음이 능력이 없음은 당연하다.
인간의 본성이 대체로 이와 같다.

참된 진리는 이전 것을 제거하는 능력과 동시에 임한다.
갈라디아서 교인들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심연의 인간본성, 보상과 처벌의 종교성을 들이밀자, 쉽게 따르고 만 것이다.

본성을 제거하지 않는 진리의 수용.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밝히 드러낸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은 두 여자로부터 태어났다((22절).
하나는 애굽에서 온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은 자녀를 약속받았으나, 약속의 성취가 지체되자, 자기 생각대로, 인간의 방법, 세상의 이치대로 여종을 택하여 아들을 낳는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다.
아브라함이 인간의 방법대로, 자기 생각대로, 세상의 이치대로 아들을 얻었으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하셨다. 그가 이삭이다.

아브라함의 두 여자는 하나님의 두 언약, 율법과 약속(복음)에 대한 비유이다(24절).
하갈은 시내산의 율법을 비유하며, 사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비유한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방법, 후자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적 이해, 인간의 방법을 초월한 불가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례로 남편있는 아내가 아이를 낳고, 해산하는 고통으로 아이가 태어나야 하는데, 홀로 사는 여자, 남편 없는 여자의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보다 훨씬 많다(27절). 이로써 잉태하지 못한 자가 기뻐하고 즐거운 소리를 외친다.

참된 신앙은 인간 이해의 틀을 넘어선다.
인간의 방법, 세상의 이치, 신앙의 관행을 초월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형제들아, 우리는 자유있는 여자의 자녀라,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좇으라"

인간의 방법으로 난 아들과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아들이 한 집에 거할 수 없다.
인간의 방법, 세상의 이치, 신앙의 관행은 하나님의 방법, 복음의 진리, 생명의 역사에 핍박을 가하고 고통을 가한다.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인간의 본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진리는 수용될 수 없다.

이 아침, 나는 누구를 내쫓고 무엇을 제거해야 하는가!
성령께서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내 속에 견고히 뿌리박힌 인간적 본성을 제거하라고 깨우치신다.
사람의 방법으로 난 아들이 성령의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을 괴롭혔듯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인간의 관점, 세상의 이치, 신앙의 관행, 이해의 범주들이다.

지금의 나의 실존, 나의 상황에 있어 어느 부분은 결코 인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세상의 이치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더구나 신앙의 관행으로도 용납되지 못한다.
나도 스스로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수시로 올라온다.
이것들이 시시로 새벽에도, 밤에도, 한낮에도 나를 사로잡는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적 생각, 사람의 이치들을 그대로 품고, 어떻게 새 생명의 역사를 기대하는가! 이는 본성의 제거없이 복음의 진리를 수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참담하고 씁슬한 나의 실존을 목도하며,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나,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핍박하는 땅에서 난 생각, 관행, 습관, 세상이 주는 이치, 진리에 반하는 사람의 생각들을 다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한다.

"너는 약속의 자녀이다. 네 속에 있는 여종을 내어쫓으라, 성령 안에서 자유한 여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라!"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보다 홀로 있는 여자의 아들이 더 많을 것이라!
이 말씀에 아멘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물밀듯이 넘치고 있다.

묵상캠프, 굿뉴스사역연구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로 만나는 생활이, 물이 바다에 넘침같이를 소원하며 시작되었다.
이 일에 내 속의 옛 사람은 사람의 방법, 세상의 이치를 추구하려 하나,
이제 하나님의 신뢰안에서 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한다.
나의 방법, 인간적 계산, 이해의 범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머물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수종들며, 이 소명을 다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이 아침, 잉태하지 못한 여자의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되어 외쳐진다.

"잉태하지 못한 여자여 즐거워하라, 기뻐 외쳐라"

그 몸이 쇠사슬에, 그 발이 차꼬에 차인 요셉,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진실을 증거하였다(시 105:19).
이 아침, 세상에 갇힌 나, 사람들에게 갇힌 나, 상황에 갇힌 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의 진실을 증거하나이다. 할렐루야!

♦묵상 기도

아버지.
이 아침 스스로를 멸시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 아버지께 나왔나이다.
저는 자유의 아들이나, 수시로 여종의 아들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이치, 신앙의 관행, 인간적 이해로 볼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저를 짓누릅니다.

아..
아버지. 진리 안에서 자유자의 아들로 살기를 원합니다.
나를 옥죄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여종의 아들로 살게하는 인간적 생각, 세상의 이치, 신앙의 관행들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굿뉴스사역. 묵상캠프.
인간적 방법과 이해, 세상의 이치가 아닌, 오직 아버지를 신뢰하며,
아버지가 행하심을 보며 따르게 하소서.
남편 있는 여자보다 남편없는 여자의 자녀가 더 많을 줄 믿기에,
내 방법, 내 생각을 다 내려놓고, 초조하지 않으며, 평강 가운데, 순종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으로 저의 진실을 드러내시니 감사합니다.
영광받으소서. 할렐루야!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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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