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왈즈
존 왈즈. ©Christian Daily International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존 월즈의 기고글인 '대만 ‘귀신의 달’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The gospel in the context of Taiwan's ghost month)를 9월 4일(현지시각) 개제했다.

존 월즈는 대만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이자 목회자·교사이며 작가다. 그는 14년 이상 대만에서 교회 개척과 제자훈련,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해 왔다. 사역과 함께 성경, 선교, 영적 성장, 특수교육,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마주하는 도전과 격려에 관한 글도 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음력 7월이 되면 대만 곳곳에서는 이른바 ‘귀신의 달(Ghost Month)’을 맞아 이승으로 나온 떠도는 영혼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각 가정은 집 앞에 등불을 밝혀 영혼들의 길을 안내하고, 이들을 에둘러 ‘호형제(好兄弟, 좋은 형제들)’라고 부른다. 집 입구에는 음식과 여러 물품을 차려 그들을 대접한다.

사람들은 흔히 음력 7월을 ‘귀신의 달’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이 떠도는 영혼들을 직접 ‘귀신’이라 부르기보다 ‘호형제’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위해 마련하는 제상도 단순한 문화적 장식이 아니다. 대만 국사관(Taiwan Historica)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제물을 바치는 데에는 호형제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달래고 집안의 평안과 보호를 기원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영혼들은 제물을 받기 위해 집 가까이까지 초대되지만, 집 안으로까지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음식과 향, 기타 제물들은 일반적으로 집 밖에 차려놓는다. 대만 교육부 자료 역시 제물이 너무 적거나 음식이 충분히 풍성하지 않으면 호형제들이 불만을 품고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소개하고 있다.

필자의 아파트 근처에서 국수 가게를 운영하는 한 친구는 대만 사람들이 종교를 대하는 흔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가게 한편에 토지신(土地神)을 모셔두고 있다. 언젠가 필자가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려 하자, 그는 말을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수님이 제 국수 장사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이 질문은 대만의 민간신앙과 종교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준다. 사람마다 종교에 대한 진지함의 정도는 다르지만, 종교가 실제로 의미 있으려면 현실의 삶에 어떤 이익이나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토지신의 대체재나 재물을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신, 혹은 귀신을 막아주는 보호 부적 정도로 축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국수 가게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만으로 한 사람의 세계관 전체를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설령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상대가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 토지신과 우주의 창조주가 어떻게 다른지를 차분히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대화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종교관의 ‘거래적’ 성격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귀신의 달에도 같은 구조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호형제들에게 제물을 바쳐 그들을 달래고,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채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민간신앙의 모든 전제를 한꺼번에 반박하려 하기보다, 그들이 이미 제상 위에 올려놓고 있는 문제에서 출발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두려움에서 소속으로

복음은 이 상황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골로새서 1장 12~14절에서 믿는 자는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계 안에 들어간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2-13).

복음이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보호 수단이 아니다. 믿는 자는 불안하고 적대적인 영적 존재들을 계속 달래야 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는다.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져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죽은 뒤 천국에 간다는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부터 소속과 신분이 바뀌었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울은 곧바로 답한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귀신의 달과 복음은 모두 ‘제물’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고 잠재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사람이 준비하는 제물이다. 다른 하나는 죄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희생이다. 하나는 계속 반복해야 하지만, 다른 하나는 “단번에” 이루어졌다(히 10:10).

그러나 종교를 주로 여러 영적 존재들과의 거래로 이해해 온 사람에게 ‘죄 사함’은 당장 피부에 와닿는 필요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은 상대가 실제로 느끼는 두려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정의한다.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영적 존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그리스도의 피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그분의 속량은 죄인을 자유롭게 하고, 그분의 희생은 어떤 제상도 얻어낼 수 없는 용서를 제공한다. 동시에 바울은 이 속량을 보이지 않는 권세들에 대한 두려움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받은 사람은 곧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다.

이 구원이 가능한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는 수많은 영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선언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그리스도는 수많은 영 가운데 더 강력한 하나의 영이 아니다. 토지신을 대신하는 기독교식 신도 아니고,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거래하는 또 하나의 초자연적 존재도 아니다. 그분은 영적 세계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존재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질서 위에 계신 창조주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창조됐고,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

이 사실은 필자의 국수 가게 친구가 던진 질문 자체를 바꿔놓는다. “예수님이 내 장사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더 큰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이 만족시키려는 여러 영적 존재들과 같은 범주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모든 권세조차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 있다.

필자는 전통 종교적 배경에서 성장한 뒤 그리스도인이 된 대만인들 가운데, 과거 자신들이 바쳤던 제물과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 사이의 차이를 깊이 깨닫게 된 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이 발견한 차이는 단순히 ‘더 좋은 제물’에 있지 않았다. 제물의 성격뿐 아니라 그 결과 자체가 전혀 달랐다.

예수님은 더 이상 또 하나의 의식이나 토지신의 대체재가 아니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삶 전체의 소속과 충성의 방향이 새롭게 정해지는 일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이 되었다.

국적을 바꾸는 일도 가볍게 결정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겠는가.

상대가 느끼는 ‘문제’에서 출발하라

복음을 전하는 대화는 결국 상대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인과 같은 범주와 질문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죄 사함’이 왜 기쁜 소식인지 설명하기 전에, 상대가 종교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충분히 들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보호받고 싶어 하는지, 왜 제물을 차리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만 민간신앙의 틀 안에서 보면 귀신의 달의 의식은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다. 떠도는 영혼들이 일상의 삶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제상을 차리고 그들을 달래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두려움을 조롱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달래기 위한 종교적 의식에 동참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 두려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해답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궁극적으로 대화는 십자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려면 먼저 상대가 이미 차려놓은 ‘제상’에서 출발해야 할 때도 있다.

귀신의 달에는 떠도는 영혼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제상을 차린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히 다른 소식을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고, 자신의 피로 속량하셨으며, 그들을 자신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소식이다.

복음 안에서 믿는 자는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제상을 차려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미 다른 나라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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