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1886년 6월 8일 고종 임금은 아펜젤러가 시작한 학교에 「배양영재(培養英才)」라는 글을 하사했다. 그리고 그 글에서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이 생겨났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가 세운 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인재를 길러내는 배움의 집’이라는 뜻이다. 배재학당의 교육이념은, 마태복음 20:26~28의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당시 조선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부패하고, 외부와는 단절된 어둠과 무지의 나라였다. 조선 왕조는 외세에 시달리고 있어, 나라라고 하기는 어려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참혹한 지경에 있었다. 권력과 부는 일부 왕족과 사대부들이 독점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노비들이었다. 왕실과 사대부들이 토지를 다 차지하고 있었고, 무지한 일반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이 땅은 언더우드의 기도처럼 ‘희망이 없는 어둡고 캄캄한 땅’이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목사(1858~1902)는,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4대째 스위스 독일계 이민자로, 독실한 독일 개혁 장로교회의 교인이었던 아버지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1872년 11월 11일, 자신의 신앙고백에 따라 집 근처에 있는 임마누엘 개혁 장로교회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웨스티 체스티 장로교회 집회에 참석해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장로교회보다 감리교 기도 모임과 속회 모임에서 영적 만족을 느끼더니 결국 감리교 교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뉴저지의 드류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전국 신학교 동맹대회에 참석했다가 ‘조선 선교’에 뜻을 둔 장로교의 뉴 브른스위크 신학교 출신의 언더우드를 만난다.

한 사람은 배재학당을 세우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경신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칠흑 같이 어두웠던 이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고, 잠자던 영혼들을 깨웠다. 그리고 거기서 근대 한국의 영적 지도자와 민족 지도자들을 키워냈다. 세계와 단절되고, 희망도 꿈도 없었던 이 나라는 조선의 사대부 자녀들만 갈 수 있었던 서당밖에 없었다. 그런데 배재학당은 문을 열자마자 영어, 수학, 지리, 과학, 천문학, 성경, 체육(야구, 축구 등), 그리고 토론, 연설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배재학당은 중등부, 고등부도 있었지만, 대학부도 있었다. 그러니 배재학당의 교과 과정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지개벽의 프로그램이었다.

배재학당은 그렇게 한국 근대사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었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를 세운 이승만이 입학한 학교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친구 신용우의 권유로 그의 나이 20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서양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신학문을 배움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사상에 잉태되었다. 그는 타락한 과거제도로 인해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던 늙은 학생 이승만은, 영어와 성경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죽어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에게 혁명과도 같았고, 천지개벽에 가까운 삶의 전환점이었다. 갈길 몰라 방황하는 자에게 성경적 세계관과 우주관, 자유, 평등, 민주주의는 그에게 꿈과 비전을 주었다. 이승만은 후일 회고담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은 영어를 배우기 위함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 개념이었다. 자유는 남에게 구속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적 인간을 말한다.”

이승만은 어학의 천재였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운 지 6개월 만에 초등 영어반 선생이 되었다. 이승만은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처럼 그는 어학의 천재요, 연설의 귀재요, 문필가요, 언론 가요, 위대한 정치가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났다. 이승만은 매일 채플에 참석했고, 배재학당에서 현대식 인쇄술을 가지고 신문을 발행했다. 이승만은 서재필을 만난 후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확고히 했으며, 교육만이 백성을 깨울 수 있다는 세계관으로 일관했다.

1897년 7월 구습에 얽매여 있었던 조선 땅에 서양식 학교의 졸업식이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렸다. 이날에는 조정의 대신들과 미국 공사, 영국 총영사, 귀빈 600명 이상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졸업생 대표로 연설했다. 그의 나이 22세에 ‘한국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확고한 신념 가운데 유창한 영어로 연설했다. 이승만은 배재가 낳은 영웅이요, 자유대한민국을 독립 국가로 세운 어른이다. 얼마나 그의 영어 실력이 탁월했던지, 이승만은 게일(Gail) 박사의 추천으로 조지 워싱턴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과 배재학당 대학부(Paichai College)의 성적으로, 2학년 2학기 학생으로 바로 편입이 되었다. 그는 유학 간 지 5년 만에 하버드 대학 석사를 거쳐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박사(Ph. D)를 수득한 인류 역사 최고의 천재였다. 그런데 그렇게 배재학당 출신이 건국 대통령이 되었지만, 자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최근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그의 걸작 표지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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