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숙 목사
바울세계선교회 대표 한영숙 목사 ©미주 기독일보
미주 기독일보가 오프라인 발행 1천호를 넘어 새 이정표를 세웠다. 이민교회와 함께 걸어온 23년, 미주 기독일보는 이민교회를 함께 만들어 나간 우리 주변의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억척스럽게 일궈낸 이민역사 가운데 그들의 간증은 저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 첫 순서로 바울세계선교회 대표 한영숙 목사의 삶과 목회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한인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맨하탄에 성전을 세운 한 목사의 파란만장한 목회와 사역의 뿌리는, 그보다 앞서 더 거친 시대를 건너며 믿음을 살아낸 부모 세대와 한국교회의 오래된 신앙 풍경 속에 놓여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학술활동을 이어 가며, 평생의 동반자이자 목회의 조력자였던 고 김종환 목사의 생애와 신학적 자산을 발굴하는 일에 힘쓰고 있는 한 목사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영숙 목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꺼낸 장면은 맨하탄 성전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은 경북 상주의 과수원과 고아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붙들고 살았던 부모에게로 향했다.

“서울 집 한 채 값이 3만 원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200만 원을 고아원에 넣었지요. 그때 200만 원이면 엄청난 돈이었어요. 저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컸어요.”

한영숙 목사의 집안은 4대째 이어진 기독교 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미자립교회에서 영수로 섬기며 설교와 교회 책임을 맡던 평신도 지도자였다. 어린 한영숙은 할아버지가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도 늘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키웠다. 한 목사가 자신의 삶을 두고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 같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이런 집안의 공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두고 자주 “아들이었으면 큰일을 할 텐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어린 한영숙에게 오히려 강한 독립심을 심어 줬다. 여자라고 해서 남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의식, 누구에게 기대기보다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태도가 일찍부터 형성된 것이다.

아버지 안재덕 장로의 삶은 한영숙 목사에게 더 직접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는 6•25 당시 결혼해 두 아이가 있었지만 자원입대했고, 전투 중 손목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며 목숨을 건졌다. 그때 하나님께 살려주시면 평생 고아들을 돌보며 살겠다고 기도했고, 훗날 실제로 고아원을 맡아 그 서원을 삶으로 갚았다. 한 목사는 아버지를 자상하고 가정적이면서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상주교회 유년주일학교 부장을 26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맡았고, 어린 시절 자신은 늘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가 바닥을 닦고 겨울에는 난로를 피우는 일을 했다.

집안의 또 다른 축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유교적 전통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어머니는 기질이 크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 목사는 어머니를 두고 성악을 했으면 더 행복했을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예술가적 기질이 강했고, 동시에 철야와 산기도에 몰두할 만큼 뜨거운 신앙인이었다. 말씀과 질서, 기도와 열정이 함께 있던 집안 분위기는 훗날 한영숙 목사의 내면을 이루는 바탕이 됐다.

“저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할아버지가 영수셨지요.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상주는 불교가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내 신앙을 지키고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교가 중요해, 교회가 중요해’ 물으면 저는 ‘학교는 내가 6년만 다니면 졸업하지만 교회는 내가 평생 다녀야 되니까 교회가 더 중요합니다’ 그랬어요. 나중에는 동자승하고 저를 앞에 세워 놓고 기독교와 불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지 토론하게도 했지요.”

한영숙 목사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유난히 종교적인 아이였다고 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아 두 달이나 학교를 가지 못할 정도였지만, 교회는 한 주도 빠지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지어온 약을 먹고 병세가 나아지자, 어린 한영숙은 자신이 하나님께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신앙은 일찍부터 일상의 한복판에 있었다.

한영숙 목사의 인생을 크게 바꾼 사건은 1961년 시작된 고아원 사역이었다. 4•19 이후 상주군의 유일한 고아원을 맡을 사람이 없어졌고, 결국 자신의 아버지인 안재덕 장로가 그 일을 맡게 됐다. 당시 요구된 돈은 200만 원이었다. 서울 집 한 채가 3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보통 가정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금이었다.

그 돈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어머니의 결단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논 12마지기를 팔아 절반은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나머지 절반으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작은 과수원을 샀다. 나무는 60주뿐이었지만, 그 과수원에서는 해마다 60만 원이 나왔다. 나무 한 그루당 1만 원씩 남는 셈이었다. 그렇게 해마다 쌓인 수익으로 집안 형편이 넉넉해졌고, 결국 그 돈이 아버지가 상주의 고아원을 맡는 밑천이 됐다.

바울세계선교회 대표 한영숙 목사
바울세계선교회 대표 한영숙 목사 ©미주 기독일보
이 같은 재정적 기반 위에서 안재덕 장로의 위치도 지역 사회 안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한영숙 목사는 훗날 아버지를 두고 ‘지방 유지였다’고 회고했다. 지역 교회에서도 큰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경서노회 노회장을 지냈고, 해당 노회 재단 이사장을 30년 맡았다.

하지만 고아원을 도맡겠다는 결단의 대가는 컸다. 아버지가 고아원으로 들어가면서 가족의 일상은 사실상 무너졌다. 부모는 고아원에 머물고, 자녀들은 과수원 집에 남았다. 중학생 이상 되는 고아들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과수원 집으로 오면서, 그 집은 오랜 시간 또 하나의 고아원처럼 운영됐다. 어린 한영숙은 큰딸이 아니라 사실상 가장처럼 살아야 했다. 동생을 업어 키우고, 부뚜막에 올라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하며 집을 지켰다. 훗날 그가 목회와 가정을 함께 감당하는 힘도 그때 몸으로 배운 책임감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고아원을 맡아 들어가시니까 우리 집 아이들이 오히려 고아가 된 것 같았어요. 부모님은 거기 계시고, 우리는 과수원에 남아 있었지요. 가정이라는 틀이 깨진 셈이었어요. 아버지도 그걸 늘 고민하셨어요. 자식이 있는 사람은 고아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자기 자식과 고아를 똑같이 대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셨던 거지요. 그런데도 그 길을 가셨어요. 저는 그런 집에서 자라면서 신앙이란 게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감당하는 것이라는 걸 아주 일찍 배웠어요.”

그렇다고 한영숙 목사가 눌려 자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강단이 있었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학생회 부회장 선거에 나가 2천 명 가까운 전교생 앞에서 정견발표를 하던 그는, 영어 과외 교사가 써준 원고 첫머리가 ‘따뜻한 봄날…’로 시작되자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다시 처음부터 발표를 이어 갔다. 결국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고 당선된 친구를 찾아가 축하했다. 이어 그 친구와 자신을 도와 홍보지를 돌려준 아이들까지 함께 빵집에 데려가 한턱냈다. 그런 배짱과 자존심, 쉽게 꺾이지 않는 기질도 이때 다져지고 있었다.

결국 말씀을 읽는 할아버지, 전쟁의 상처를 안고도 약한 자를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친 아버지, 과감한 결단으로 집안을 움직인 어머니, 불교권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던 학교 생활, 그리고 맏딸로서 고아원 사역 속에서 일찍부터 삶의 무게를 감당한 상주에서의 시간이 오늘의 한영숙 목사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그런 성장의 환경 이후 한영숙 목사는 결국 서울행을 결심했다.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상주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울 유학은 그에게 단순한 진학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그는 이화여고에 합격하며 상주에서 서울로 삶의 무대를 옮기게 됐다.

“여기 살아도 부모하고 같이 못 살 바에는 내가 아예 서울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화여고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어요. 그때는 영어, 수학, 국어 세 과목으로 뽑았는데, 마침 그 해에 그렇게 시험을 봐서 제가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쉽지 않았을 거예요.”

서울은 한영숙 목사에게 단지 더 큰 도시가 아니었다. 상주의 단단한 신앙 울타리를 벗어나 훨씬 넓고 복잡한 세계와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이었다. 그 무렵 그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이 들어왔다. 훗날 남편이 되는 김종환 목사였다.

한영숙 목사에게 김종환 목사의 첫인상은 썩 친근하지 않았다. 늘 고등학교 교복 같은 차림을 하고 다녔고,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기까지도 시간이 걸릴 만큼 독특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낯섦이 어린 한영숙의 사고를 흔들기 시작했다. 특히 안식일을 둘러싼 논쟁은 충격이었다. 주일에는 1원도 써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던 자신에게 김종환 목사는 안식일의 본질이 단지 그날 어떤 행동을 금하는 규칙에만 있는 것이 맞느냐고 되물었다.

“그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저는 그전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김종환 목사는 저한테 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이었지요.”

당시 김종환 목사는 이미 대학을 졸업한 뒤였고, 교회사 교수였던 이영헌 교수(2007년 별세)에게서 광나루 신학교 전액 장학 제안까지 받을 만큼 기대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신학교로 가지 않았다. 한영숙 목사는 그 배경에,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청년이 가볍게 보이던 이들이 먼저 신학교로 가는 현실 앞에서 느낀 내적 상처와, 그들과 자신을 구분하려 했던 교만이 함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곧 대학 진학으로 이어졌다. 한영숙 목사는 대학 안내책자에서 ‘기독교 여성 지도자를 기른다’는 문구를 보고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택했다. 좋은 교회학교 교사가 되려면 자신이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대했던 신앙의 심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주에서부터 붙들어 온 확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한 목사가 생각한 기독교학이 교회교육과 신앙 훈련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실제 대학에서 만난 신학은 훨씬 자유롭고 비판적이었다. 성경을 인간의 저작으로 설명하고, 신앙 체험을 철학과 심리학의 언어로 해석하는 강의들은 그의 신앙 감각을 뒤흔들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때까지 분명했던 구원의 확신이 무너진 일이 가장 컸다.

“저는 기독교학과에 가면 기독교교육 같은 걸 배우는 줄 알았어요. 좋은 교회학교 교사가 되려면 내가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까 전혀 다른 세계였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확실했던 것이 다 무너졌어요. 제일 괴로웠던 건 구원의 확신이었어요. ‘내가 오늘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나’ 그 질문 앞에서 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 안에서 발버둥을 치게 되는 거지요.”

그 시기의 한영숙 목사는 단지 의심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너진 확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절박하게 찾고 있었다. 바로 그 틈으로 교수들과 시간강사들의 문제의식이 들어왔다. 그들은 죄를 개인의 도덕적 문제보다 사회악의 문제로 보았고, 인간 구원의 길은 사회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한영숙 목사에게 이 말은 잃어버린 구원의 확신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길처럼 들렸다. 그는 훗날 그때를 돌아보며, ‘아, 이 길이 내 구원의 길이구나’ 하고 솔깃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관심은 점점 사회정의와 행동의 영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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