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말씀을 전하는 일이 큰 부담인 경우가 많은데, 나로선 영광스런 일이요 복된 사역이라 생각한다. 목회자가 아닌 그 누구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겠는가!

부흥회엔 은혜와 감동이 깊어야 한다. 설교가 ‘맛있고’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차별화되는 영양만점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으면 그 집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설교학 교수이다 보니 부담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내가 있는 곳에선 다들 설교하기를 꺼려한다는 점이다. 나도 은혜받으려고 참석했는데, 설교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과거 모 신학교 총장님이 대구에서 설교를 하시게 되었는데, 나 역시 설교 초청을 받고 내려간 김에 인사드리러 그 교회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다. 나를 보자마자 그 총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신 교수 있으면 설교하기 힘드니까 다른 교회로 가면 좋겠어!” 이렇게 부담스런 존재가 설교학 교수다.

그보다 더한 점은 두 번째 이유이다. 설교학 교수가 설교를 죽 쑤면 “설교학 교수가 뭐 저래?”라고 하고, 설교를 잘하면 “설교학 교수니까 당연하지!”라고 하는 것이다.

항간에 이런 소문이 정설처럼 나돌고 있다. “설교학 교수 치고 설교 잘하는 사람 없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소문이다. 나 빼놓고 대부분의 설교학 교수는 설교를 잘하는 게 사실이다. 더는 설교학 교수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면 좋겠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미 동부 엔필즈에서 행한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설교 한 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설교로 평가받고 있다.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책상을 붙잡고 흐느끼거나 두려워 떠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설교의 전달에 있어선 마이너스 100점을 줘야 할 만큼 좋지 않았다. 주로 설교 원고를 보고 읽었고, 가끔씩 눈을 들어 똑같은 장소를 바라보면서 설교했기 때문이다. 설교는 전달이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달에 그렇게 은사가 없는 설교자의 설교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반응이 나타났을까?

궁금한 나머지 에드워즈의 설교 원고를 수사학적으로 분석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그의 원고 속에는 ‘그림 언어’와 ‘대조법’과 ‘비교법’과 ‘과장법’과 ‘오감 언어’가 탁월하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설교 원고만 탁월하면 보고 읽기만 해도 무조건 강력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원래는 그날 에드워즈가 아니라 다른 설교자가 설교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지 않자 주머니에 설교 원고를 갖고 있었던 에드워즈가 대타로 설교했다. 그런데 그 설교는 이미 한 번 설교한 바 있는 설교였다. 하지만 그가 그 원고의 내용을 가지고 첫 번째 설교를 했을 땐 엔필즈에서 행한 설교와 같은 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때마다 장소마다 청중의 변화에 따라 설교의 반응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때와 장소가 다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본문을 연구하고, 기막힌 원고를 작성해서 그것을 백분 잘 소화하여 원고를 보지 않고 파워풀하게 설교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령님이 함께하셔야 함을 결코 놓쳐선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명언’, 그것은 바로 다음의 내용이다. “A great sermon is not the one I preach, but the one led by the Holy Spirit.” “위대한 설교는 내가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령님이 이끄시는 설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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