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아니요, 그리스도인이여 당신들은 구원을 잃을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No, dear Christian you cannot lose your salvation. Ever)를 최근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랫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한 질문이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 삼촌 헨리는 교회 문이 열릴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하던 사람이었어요.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교회와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다양한 직분으로 봉사하고, 늘 기도하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고, 교회에 발도 들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존 치프먼(John Chipman)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성경적 교리인가?(Is 'once saved always saved' a biblical teaching?)」라는 글에서 바로 이런 사례를 언급하며, 헨리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는 모습을 성경에서 인용하여 “그리스도인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의 핵심 교리 중 하나다.
하지만 필자는 그 견해에 공손히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헨리 아저씨들”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 싶다.
1. 구원에는 두 가지 가능성만 있다
구원과 그 지속성에 관해서는 단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한다. 현실과 경험 모두에서 일시적인 중생(temporary regeneration) 현실과 경험 모두에서 영원한 중생(permanent regeneration) 이 두 가지 외의 제3의 가능성은 없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첫 번째 입장을 택한다. 즉, 한 번 거듭나 회개와 경건한 삶의 길에 들어섰다가도 다시 믿음을 버리고 “영적으로 죽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성화의 과정이 그 사람의 의지로 무효화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그들의 구원의 지속 여부는 전적으로 자기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가? 당신의 영원한 운명이 당신 자신의 의지와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섬뜩하지 않은가? 치프먼은 “자신의 미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묻고 싶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다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나는 구원의 확신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이 일시적이라면, 확신 또한 일시적일 뿐이다.”
2.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구원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두 번째, 즉 하나님이 행하시고 지키시는 영원한 중생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크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으며 마지막 때에 나타내기로 예비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준비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3–5)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시고 유지하신다. 치프먼은 빌립보서 2장 12절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구원의 지속은 인간의 책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바로 다음 절을 무시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이 구절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그 완성까지도 계획하신다.
신학자 A. A. 하지(A. A. Hodge)는 이렇게 말했다. “중생은 한 번의 단일한 행위이며, 그 자체로 완전하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3. 그렇다면 ‘헨리 아저씨’들은 어떻게 된 걸까?
그렇다면 헨리처럼 한때 믿는 사람으로 보였다가 지금은 믿음을 버린 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은 구원을 잃은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한일서 2:19)
키스테메이커(Kistemaker)와 헨드릭슨(Hendriksen)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주석한다. “이 본문은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가르친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교회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들의 교회 내 존재는 일시적이었다. 만일 그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성원이었다면, 끝까지 믿음을 지켰을 것이다. F. F. 브루스(F. F. Bruce)는 ‘성도의 견인은 성경적 교리이지만, 그것은 태만한 자를 안일하게 만들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견인은 거룩함의 본질적인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4.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
표면상 “믿는 자”처럼 보이던 사람들 중 일부는 결국 예수를 떠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다. 그들의 배교(背敎, apostasy)가 바로 그 증거다.
참된 신자는 이렇게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존된 자”(유다서 1:1) 이것이 바로 가장 복된 소식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평안과 확신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나의 구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왜곡된 복음과 구별되는 참된 복음의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드러낸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은 나를 구원하고 내일은 나를 버리는 복음, 한 시간은 나를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삼고 그 다음 시간에는 마귀의 자식으로 만드는 복음, 한때는 나를 의롭다 하다가 곧 정죄하는 복음, 나를 용서했다가 다시 지옥에 던지는 복음, 그런 복음은 이성에도 어긋나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더더욱 반대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복음을 믿을 수도, 전할 수도 없다.” 그렇다. 이에 대해 아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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