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죄와 씨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You’re not a Christian unless you struggle with sin)를 2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다.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오래도록 필자를 따라다닌 것이다. 사실, 그 싸움은 필자가 처음 믿음을 가졌을 때보다 지금 여러 면에서 더 치열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필자가 죄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필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하는 증거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아마 어떤 이들은 지금 당장 ‘거룩함’, ‘성화’,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에 대해 반박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만 인내하고 필자의 말을 들어보라.

비그리스도인은 죄와 씨름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처럼 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죄의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후의 상태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윗은 시편 51편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즉,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의롭지 못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인내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조급하다. 자기중심적이다. 쉽게 화를 낸다. 용서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한다. 탐욕스럽다. 이런 성향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본능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들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이용해 자신을 위해 산다. 기독교 변증가 J. 워너 월리스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죄가 곧 내 삶이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죄와의 싸움이란 것이 없다. 오히려 죄에 무감각하고, 죄가 욕망을 채워줄 때는 더더욱 돌이킬 마음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우리는 다시 태어났고(요 3:3),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으며(롬 6:22), 회개하고 의롭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다.

즉, 예전에는 죄의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죄를 자각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옛 본성이 남아 있어 다시 그곳으로 뛰어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팀 켈러의 말처럼 “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권세”이기 때문이다.

일부 극단적인 집단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죄 짓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전 7:20), “의인은 많이 실수한다”(약 3:2)라고 분명히 한다.

이처럼 신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모순적 상태 속에 살아간다. 루터가 이를 “Simul Justus et Peccator”(동시에 의인인 동시에 죄인)라고 표현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 안의 갈등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유가 가능하다고 외친다(롬 7:24–25).

바울의 결론처럼, 그리스도인은 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이 참된 구원의 증거다.

물론, 요한일서 3장 6절이 말하듯, 습관적으로 죄 가운데 사는 삶은 점점 사라져야 한다. 참된 신자는 점점 더 죄에 민감해지고 거룩을 사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참된 성도는 죄와 씨름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말한다. 존 맥아더 역시 성화는 점진적 과정이며,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동시에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라는 기도를 가르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비그리스도인은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나는 당신이 말하는 ‘죄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목사는 “시체 위에 400파운드를 올려두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지금 죄의 무게를 느끼는 이라면,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주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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