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쉐인 아이들먼 목사의 기고글인 ‘부흥의 탈취’(The hijacking of revival)를 14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아이들먼 목사는 캘리포니아주 랭커스터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북쪽 웨스트사이드 크리스천 펠로우십의 창립자이자 수석 목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부흥”이라는 단어가 마치 특별한 기름부음을 담고 있는 것처럼 남발되고 있다. 유명한 찬양 인도자나 잘 알려진 목회자를 초청해 집회를 열면 그것을 곧 “부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부흥이 아니다.
부흥은 인간이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내려주시는 역사다. 우리가 제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불을 주신다.
영적 손상
사람들이 진짜 부흥이 아닌 것을 부흥이라고 착각할 때, 영적 손상이 발생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단지 쇼를 벌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속에 휘말린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다른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거나, 교만해지거나, 혹은 시간이 흐른 뒤 약속된 은혜나 치유가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거나 소망을 잃게 된다. 가짜 부흥에서 좋은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잘못된 영으로 가득 찬 모습
천사가 깃털을 떨어뜨린다거나 공기 중에 금가루가 흩날린다거나, 성령 충만하다기보다 오히려 악령에 사로잡힌 듯 행동하는 사례들처럼, “부흥”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남용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도들이 이런 장난 같은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진정한 부흥은 강단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깊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옛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취한”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철저히 부서졌다.
주의 두려움은 어디에 있는가? 경외심은 어디에 있는가? 회개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아무리 “부흥”이라 불러도 그것은 부흥이 아니다.
정의가 중요하다
물론 최근 대학 캠퍼스나 몇몇 교회에서 실제로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음을 믿는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부흥”이라는 단어는 남용되고, 오용되고, 탈취당하고 있다.
성경적 의미에서 “부흥”은 종종 하나님의 사역을 다시 일으켜 달라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기름부음을 부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 속에서 사용된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소생시키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게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시편 85:6).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려 다시 빚으신다
필자가 쓴 책 ‘I Almost Quit’에서도 다루었듯,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깨뜨리신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이 진정한 부흥의 메커니즘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상황과 환경을 통해 여러분을 낮추시고, 사람들로부터 잊히게 하시며, “좋아요”와 팔로워가 줄고, 우정이 희미해지고, 교회와 사역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사역을 성장시키지 않으신다면, 아마도 우리의 성품을 성장시키시려는 것일 수 있다. 깨어짐은 즐겁지 않지만, 강력하다. 하나님은 깨뜨려서 다시 빚으신다. 부흥의 능력은 깨어진 그릇을 통해 흘러간다.
높아짐은 깊어짐을 요구한다
물론 하나님은 교회를 성장시키시고, 사람을 높이시고, 사역을 확장시키실 때도 있다. 그러나 사역에서 높아질수록, 기도 골방에서 더 깊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들어 사용하실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히 낮아져야 하며, 더 많이 섬겨야 한다. 영적 높이는 반드시 영적 깊이를 요구한다.
광고로 부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대부흥, 미국의 대각성 시대처럼, 남자와 여자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오랜 기도 모임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성령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진정한 정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이름도 없었고, 페이스북 광고나 인스타그램 홍보도 없었으며, 셀카나 자기중심적 태도도 없었다. 단지 하늘이 다시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굶주린 신자들이 있었을 뿐이다(이사야 64:1).
부흥은 불편하다
웨슬리와 화이트필드가 1700년대에 수많은 시간을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거나, 1949년 던컨 캠벨이 헤브리디스 제도에서 부흥을 외쳤을 때처럼, 하나님을 찾는 일은 결코 편리하지 않다. 우리는 추구하고, 밀고 나아가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도시가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작은 시골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는 접근하기 쉽지 않고, 편리하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완벽한 선택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나니”(고린도전서 1:27).
하나님의 뜻은 종종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흥의 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비친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하늘이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부흥의 비를 내려주시기 위해(이사야 64:1), 우리의 마음 밭이 갈아엎어져야 한다. 교만의 묵은 땅을 깨뜨리고, 숨겨진 동기를 죽이며, 자아를 높이는 죄를 회개하고, 얽매인 죄와 맞서야 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부흥을 일으키기를 기다리지 말라. 여러분의 마음에 불길을 지펴라. 하나님은 부흥을 종종 가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보내셨다. 대형 교회나 다 campus 사역이 아니라, 단지 하늘이 열리기를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한 절박한 구도자를 통해서였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영적으로 깨어나도록 기도하지 않겠는가?” 이 질문을 던지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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