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버슬러(Julie Busler)는 성경 교사이자 작가, 그리고 강연가이다. 그는 자신의 슬픔 속에서도 사람들이 희망과 기쁨을 찾도록 돕고 있다. 특히 정신 건강을 옹호하는 그는 두 권의 책을 쓰기도 했다. 또 라이프웨이 여성 성경 공부 모임인 『그레이트풀』(Grateful) 의 기고 작가이기도 하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글을 크리스천포스트(CP)에 기고한 전문이다.
◈예기치 못한 자살의 충격
자살 유가족이 되는 것은 필자 인생의 계획에 전혀 없었다. 주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안타깝게도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원치 않게 남겨진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자살은 예방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미국에서 주요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크든 작든 자살의 영향을 받은 적 있다는 뜻이다. 자살로 인한 슬픔은 극심하며 분노, 배신감, 수치심 등 다양한 감정을 동반한다.
◈지연 애도의 그림자
아버지의 죽음이 가진 의도성은 필자를 혼란스럽고 복잡한 애도의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를 흔히 ‘지연 애도(prolonged grief)’라 한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지연 애도의 성격과 ‘장애’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의 중이다. 그러나 2022년 지연 애도 장애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TR)에 추가되었다. 정의에 따르면 지연 애도는 최소 12개월(아동·청소년은 6개월) 이상 지속되며, 고인과의 관계가 깊었던 이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병리적 반응이다. 이 과정에는 고인에 대한 강한 그리움, 끊임없는 생각, 죽음을 믿기 어려움, 회피, 극심한 고통, 관계 단절, 미래 계획의 어려움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복잡한 애도는 잔혹하며 삶 자체를 무너뜨린다.
자살 애도는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죽음에서 비롯된 다른 트라우마성 사망과 마찬가지로 종종 복잡한 애도를 초래한다. 이는 충격, 당혹감, 근본적 신념의 흔들림을 동반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자살 유가족은 외상후스트레스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직접 목격했거나 시신을 발견한 경우 악몽과 회상을 겪을 수 있으며, 심지어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상상을 멈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상상은 때로 현실보다 더 잔혹하다”고 지적한다.
◈애통을 통한 신앙의 붙듦
이러한 순간, 슬픔과 혼란, 의문 속에서 하나님께 애통의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믿음을 붙드는 데 필수적이다. 애통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씨름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길을 열어 준다. 정상 애도와 복잡한 애도의 초기 증상은 유사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상 애도는 옅어지는 반면 복잡한 애도는 심화된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슬픔을 드러내면 수치스럽다는 믿음을 굳게 쥐고 살았다. 그래서 감정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저를 복잡한 애도로 이끌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아버지의 죽음은 제가 이미 예수를 영접한 이후에 일어났다. 필자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이해했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었다. 예수께서 저를 죄에서 해방하셨다는 믿음도 있었고, 기도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여전히 깊이가 부족했다. 마음속 복잡한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고, 하나님께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이라 여겼다. 부모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필자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복잡한 감정을 원하신다.
◈우울과 외상후스트레스의 동반
필자의 이야기는 단순히 복잡한 애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복잡한 애도는 우울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함께 나타나기도 하는데, 필자 역시 그랬다. 아버지의 자살 이후 거의 20년이 지나 정신적 붕괴와 입원을 경험하면서 마침내 필요한 도움을 받게 되었지만, 사실 주요 우울장애와 PTSD는 오랜 세월 제 삶에 함께 있었다. DSM-5-TR 역시 “지연 애도 장애는 PTSD와 함께 나타날 수 있으며, 폭력적 사망(살인, 자살 등)의 경우 더욱 흔하다”고 기록한다.
필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다는 절박함과, 동시에 필자를 버린 아버지를 왜 그토록 신경 쓰는지에 대한 혼란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이 집착은 결국 필자를 자살 충동으로 몰아넣었다.
◈끝없는 반복의 굴레
시간이 흐르면서도 나의 생각은 아버지와 그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낡은 VHS 테이프처럼 그날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됐다. 작별 편지를 떠올리며, 그는 어디에 앉아 마지막 글을 썼을지, 자녀들을 생각했을지 끊임없이 상상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필자는 아버지와 하나님께 동시에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왜 막지 않으셨나요? 왜 실패하게 하지 않으셨나요? 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않으셨나요?” 이런 질문들은 당시 애통을 알지 못했던 제 안에서 비틀린 반추(rumination)로만 남았다.
비건전한 반추는 바울이 말한 “모든 생각을 사로잡으라”(고린도후서 10:5)라는 권면과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복잡한 애도를 겪는 이들에게 반추는 흔하다. 필자에게 반추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오히려 걱정을 키웠다. “또 다른 누군가를 이렇게 잃으면 어떡하지? 나도 같은 길을 가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과 반추는 다르다. 반추는 과거에 매이고, 걱정은 미래를 향한다. 필자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화, 협상, 수용 없이 깊은 우울 속에만 갇혀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애도를 억누른 것은 곧 하나님께도 슬픔을 감춘 것이었다. 과거에 집착하는 반추는 하나님께 고통을 내어 맡기지 못하게 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지 못하게 했다. 외상은 필자를 늘 긴장 속에 가두었고, 자살 충동은 삶에 의미가 없다고 속삭였다.
◈회복과 소망의 길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뒤 필자의 인생 방향은 바뀌었지만, 진정으로 필자를 되살린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경험이었다. 그분과 연결될 때 비로소 슬픔은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희망을 일깨우는 교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과 달리 소망 가운데 애도할 수 있을까(데살로니가전서 4:13)? 무의미한 절규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로 바뀔 수 있을까? 전 세계 교회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애통’이다. 애통은 단순히 참고할 요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애도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다.
애통을 통해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마음으로 슬픔을 견디는 신비를 경험한다. 애통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씨름하는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건강하게, 그리고 하나님께 붙들린 방식으로 슬픔을 살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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